2005-08-03

백두산 정계비터 정확한 위치 찾았다

 [오마이뉴스 2005-08-03 15:35] [김태경 기자]

▲ 북한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터 표지석. 검은색 돌은 지난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사용했던 주춧돌로 보인다. ⓒ2005 고구려연구재단


▲ 백두산 정계비터에서 바라본 토문강의 흔적. 가운데 빨간 색 타원 안이 토문강이 흘렀던 곳으로 추정된다. ⓒ2005 고구려연구재단

광복 뒤 처음으로 백두산 정계비터의 위치가 남측 학자들에 의해 확인됐다. 그동안 남한 내에서는 정계비터의 정확한 위치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지난달 19일부터 30일까지 방북해 북한 학자들과 고구려 유적 공동 조사를 벌였던 고구려 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 측은 이번 방북 기간 중 백두산 동남쪽 4㎞ 지점(해발 2200m)에 있는 백두산 정계비터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고 3일 밝혔다.

 백두산 정계비는 지난 1712년 세워졌으나 지난 1931년을 전후해 일제가 철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광식 재단 상임이사는 “백두산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는 주차장 모퉁이 북한군 초소 뒤에 백두산 정계비터가 있었다”며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등정한 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북한군 초소 뒤에 있는 이 정계비터를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재단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 사용했던 주춧돌이 있고 그 위에 북한 당국이 지난 1980년 세운 흰색 비석이 있다. 일종의 표지석같은 이 비석에는 아무 설명도 없어 그냥 봐서는 백두산 정계비터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고구려 연구재단의 배성준 연구원은 “북한에서 출판한 중국어판 백두산 안내서에도 이 곳을 ‘백두산 사적비’라고만 했을 뿐 정계비터라고 표기하지 않아 직접 설명을 듣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1962년 중국과 국경 협정을 맺은 국경선을 확정한 북한 당국이 간도 문제 등 민감한 문제가 얽혀있는 백두산 정계비터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최 이사는 “그러나 초소에 있는 북한군들은 모두 이 비석이 백두산 정계비터를 확인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배 연구원에 따르면, 백두산 정계비터를 보면 원래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져있던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라는 말의 뜻을 알 수 있다.

 즉 백두산 정계비터에서 볼 때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며, 동쪽으로는 토문강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 청나라는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고 주장했으나 두만강의 발원지는 백두산 정계비터 앞쪽에 보이는 대학봉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토문강은 송화강의 한 지류다.

 안악 3호분 등 남쪽 학자들에게 처음 공개

 이에 앞서 지난 3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는 여러가지 자료 등을 토대로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주차장과 북한군 초소 부근에 정계비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재중동포들이 제작해 지난 1997년 9월 14일 KBS가 방영한 <일요스페셜> ‘최초공개 북한에서 본 백두산’에서도 정계비의 주춧돌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남쪽 학자들이 백두산 정계비터의 모습이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이번 남북 공동조사에서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원들은 덕흥리 고분, 수산리 고분, 안악 3호분 등에서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유리벽 안에 들어가 직접 벽화를 촬영했다.

 고분 벽화 사진을 촬영한 김진순 연구원은 “이제까지 공개된 고구려 벽화고분 사진은 그리 자세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자세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이번 조사에서 그동안 알려진 ‘강서 소묘’의 도면이 잘못된 것을 확인했다. 강서 소묘의 도면은 일제 시대 때 잘못 제작된 도면이 이제까지 그대로 통용되어 왔으며 북한 학자들도 이 사실을 몰랐다. 안악 3호분·태성리 3호분·인민 대학습당 부근의 평양서 각석은 이번에 처음으로 남측 학자들에게 공개됐다.

 김정배 이사장은 “이번 조사는 광복 뒤 처음으로 이뤄진 고구려 유적 남북 공동조사였고 새로운 성과도 있어 고대사 연구에 새 계기를 마련했다”며 “우리 재단은 이번 공동조사에서 남북 학자간 주고받은 논의 내용을 정리해 앞으로 남북 공동 학술토론회로 연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안악 3호분의 무덤 주인공을 놓고 중국의 망명자인 ‘동수’설과 ‘고국원왕’설(북한 쪽 주장)이 맞서고 있다. 북한 쪽은 특히 이 문제와 관련한 공동학술토론회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경 기자

2005-05-18

조선(朝鮮)』의 유래(어원)

 1. 통설

‘ 아침의 신선함 ‘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알고 있음( 지나(중국)중심의 얕은 생각임 )
2. 문헌 및 각설
1) 최초 문헌 등장
《관자(管子): 춘추시대 BC8~7 제(齊)나라 ‘관중(管仲)’이 지음-주된내용은 BC403~221에 추가됨》경중편에 하나의 “지명”으로 ‘조선’이 언급됨.
2) “조선에는 명칭은 열수(冽水)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冽水),산수(汕水)라는 3개의 강이 있다. 이강들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AD3C 위나라 장안(張晏)
3) 동쪽의 해 뜨는 곳에 거처함으로 조선이라고 하였다-신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군명(郡名)조
4) 조선의 음은 조선(潮仙)이다. 물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동사강목:안정복》〈잡설〉‘조선명호’ 인용《국조보감》
5) 선은 밝은 것이다. 땅이 동방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므로 고로 조선이라 했다.-《동사강목:안정복》〈잡설〉‘조선명호’ 인용《조선고이》
6) 신채호.정인보 설
《만주원류고:1777》에 근거하여 만주어의 “주신(珠申,州愼)”과 비슷한 말로 풀이하여, 《만주원류고》에서 ‘주신’을 ‘소속(所屬)’으로 풀이하듯 ‘관경(管境)으로 풀이하고 ” 주신->숙신, 조선 ”
7) 리지린(북학학자) 설- 숙신족(현 만주 동북-사할린 지역 여진족의 명칭으로 통설됨)종족 명칭에서 유래.
8) 기타 설
아사달->아사+달(아침의 땅)-[한자의역]조선(朝鮮)

3. 내생각
1)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바꾸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는 할 때 화령(和寧:영흥의 옛 이름)과 ‘조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 사실이 있는 것은, 먼저 ‘화령’은 자신의 출신지명을 따온 것이고 ‘조선’은 자신이 세운 나라 강역의 옛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보통 옛 나라이름을 따올 경우, 시대적으로 뒤에 오는 나라이름은 ‘뒤(後)’ 또는 ‘새(新)’라는 접두사가 붙기 마련인데, 그러한 접두사가 없이 옛이름을 바로 가져다 쓴 것은 고려말까지만 하더라도 옛 조선(고조선)을 당시의 왕조국가 형태의 나라(국가)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반증이기도 하며, 당시국가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연맹체의 국가나, 지역을 지칭하거나, 종족을 지칭하는 형태의 ‘조선’이 있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 명칭으로 대변 되는 ‘지역(강역)’ 또는 ‘종족(민족)’이 당시(조선 건국)의 주류세력가 일치한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2) 《삼국유사》〈기이편〉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乃 往二千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霧葉山亦云白岳在白州或云在關城東本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여(산해경엔 무엽산이라 했고, 또 백악이라고 했으니 백주에 있다. 달리 관성 동쪽에 있다 하니 백악궁이라)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니 요임금과 같은 때라」
현존하는 삼국유사는 1512년에 간각된 경주판으로 조선중기 판본이기에 古朝鮮의 ‘古’를 붙이고 ‘왕검조선’이라고 표기한 건 1512년 당시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함이라 보여진다. 김부식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1281년)에 ‘조선’이라는 명칭에 ‘古’자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째거나, 김부식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에도 왕조 또는 당시의 국가형태로 볼 수 있는 ‘옛 조선’의 자료는 지나(중국)의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정임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옛 조선의 주체가 당시의 고려가 계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조선’의 명칭이 유래를 ‘국가명’으로만 고집하다 보면 지난 몇백년동안의 논쟁과 같이 억측만 난무할 뿐이다.
– (조용한)아침의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말은 한낮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이야기다. 이 말은 근세의 중화주의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 아사달 역시 억측에 불과하다
– 주신-숙신, 조선 상당히 일리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용어가 바로 조선으로 변천한 것이라는 것은 무리이다.

3) 확실한 건
가) ‘조선’이라는 용어가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BC 5C 전에 존재했다는 것
나) 지나(중국) 동북쪽 한반도 북쪽에 존재한 명칭이라는 것
다) 최소한 지역, 종족(민족)을 대표하는 명칭이라는 것


이상의 확실한 근거를 놓고 보면, 만주강역(지역)에 수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져가거나 변형되어온 여진,숙신,읍루,부여,고구려,구려,거란,연,산융 등등의 종족이름이면서도 지역이름과도 같은 성격을 가진 명칭들과 같이 ‘조선’ 또한 어원의 출발은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단군, 위만, 기자 등의 조선지역에 주류세력으로 누대에 걸쳐 거쳐간 세력 또한 ‘조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져 그 특정세력과 특정거점이 이동과 변천을 거듭하지만 이를 계승하였다고 여겨지는 각 시대마다 당시의 조건하여 조선의 후계라고 믿었을 것이며 고려를 이은 태조 이성계 또한 이와 같은 의식이라 본다.

다시 언어의 근원을 정리하자며
‘조선’이라는 용어는 현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존재했던 종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나라이름으로 확장된 용어이며, 뜻이 되는 어원은 고대어를 돌이켜 보기는 어려우나, 일설에 의한 ‘주신(신으로부터 부여받은)->쥬시엔->조선’과 도 같이 어느 종족이든 자신의 종족의 명칭을 말할 때는 당시의 언어로서 최고의 성스러움이나 권한,존중을 나타내듯이(보기; 이스라엘(신의나라) 중국(중심의 나라), 일본(태양의 나라) 등) 신과 결부된 최상의 뜻을 가진 언어로 말하듯이 ‘조선’ 또한 그러한 듯을 가졌다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뜻에 관련한 어원으로
신지(神誌), 식신(息愼), 숙신(肅愼), 진한(辰汗),여진(女眞),주인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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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朝鮮의 朝는 ‘돌(鳥)’을 음차함인가? | 박구위瓠公

朝(조)는 ‘돌’의 음차일까?

朝鮮(조선)은 무슨뜻인가? 그 어느 누구도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대개 朝鮮(조선)이란 첫도읍의 이름인 ‘아사달’을 따라 아침을 뜻하는 朝를 썼다고 하지만, 이런 해석은 고대에 우리나라 지방명을 漢語(한어)로 번역하여 썼다고 결론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경덕왕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지방명은 대개 음차이며 朝鮮(조선)이란 이름이 尙書(상서)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는 漢譯(한역)이 아니라 음차이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朝鮮이란 우리고유어를 음차한 글자로서 쉽게 한자어로 쓰면 鳥白國(조백국)의 뜻이며 혹 鳳凰白國(봉황백국)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 이유를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鮮자로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鮮(선)의 뜻

어느시댄가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우고 자신에게 신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雄(웅)으로 신격화하고 어머니를 곰이라 하여 그 시대의 동물숭배자들과 융화를 꾀하였던 땅이 곧 백산(白山)의 영역안에 있었다. 고대국가는 보통 그 첫도읍의 이름을 국가명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단군왕검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세운 국가의 도읍이 바로 白山(백산)의 줄기에 있었으며 白이란 뜻의 관형어가 우리말로 ‘센’이므로 국가명에 鮮을 썼던것이며 이는 ‘센’으로 읽어야만 한다. 오히려 朝鮮이란 국명의 주요점은 朝에 있는 것이 아니라 鮮에 있다. 그 증거가 대동운부군옥에 있는데 朝鮮(조선)과 震檀(진단)은 같은 이름이라고 하였다.
震檀(진단)의 震은 ‘센’을 음차한 글자이고 그 뜻은 곧 白이며, 檀은 박달나무와 아무런 연관이 없고 더군다나 ‘밝음’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저 오늘날 ‘고을’, ‘마을’, ‘실’과 같은 지명어미이다. 삼국사기에는 呑(탄)을 많이 썼고 중국사서에서는 屯이라 하였던 말이다. 따라서 震檀「센단이란 그저 白國(백국)의 뜻이다.
따라서 朝鮮(조선)에서 중요한 글자는 鮮으로 ‘센’으로 읽으며 白의 뜻이고 震檀(진단)에서 중요한 글자는 震으로 ‘센’으로 읽으며 白의 뜻이다.

朝(조)는 ‘돌’의 음차일까?

이유는 알수없지만 우리조상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던 ‘새’를 숭상하였다. 고조선 유민이 세웠다던 辰韓(진한)으로부터 출발한 신라는 ‘斯盧(사로)’라고 하였던 국가인데 ‘盧’는 지명어미 ‘나라’의 뜻이며 ‘斯’는 우리말 ‘새’를 음차하였음이 분명하다. 역시 新羅(신라)도 삼국사기에는 새롭게 번창하느니 뭐니 견강부회하여 써놓았지만 이 역시도 ‘새라’ 즉 ‘새의 나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새’를 뜻하던 다른 말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돌’이다.[1] 이 말은 ‘ㄱ’곡용을 하던 체언으로서 그 흔적이 ‘닭’에 남아 있음은 ‘돌’에 주격조사 ‘이’를 붙이면 ‘돌기’가 되는데 오늘날 문법에 곡용을 허용하지 않고 체언뒤에 받쳐쓰기때문에 ‘닭’으로 변하였음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새’를 빗대어 삼국사기에 ‘鷄林(계림)’이라 하였었다. 아직도 ‘돌’이 붙은 새이름이 몇개 보이는데 ‘까투리’와 ‘팥닭’ 즉 뜸부기이다. ‘수리’란 맹금류를 칭하는 이름이었던 것처럼 ‘도리’를 접미어로 붙인 새들은 머리에 볏이 있거나 깃이 화려하다고 볼수있을까? 닭은 볏이 뚜렷하고 까투리는 암꿩으로 그 깃이 화려하여 박제를 많이 하였던 새이고 팥닭은 화려하거나 크지는 않지만 머리에 볏같은 깃이 조그맣게 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의 머리에 난 ‘볏’을 빗대에 ‘벼슬’한다고 하였던 것이며 우리나라의 상징은 예로부터 봉황이었다.
따라서 원래국호 ‘센「白‘을 鮮의 음차하고 그 앞에 국가의 상징이었던 ‘볏달린 새’를 뜻하던 ‘돌’을 그 앞에 붙여 ‘돌센’이라고 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朝의 음은 고대에 ‘조’가 아니라 ‘됴’이었을 것이다. 朝는 倝와 舟가 합쳐진 글자인데 舟의 小篆(소전)이 月의 楷体와 비슷하였기에 朝의 형태를 띄었지만 음은 舟를 따라야 한다. 舟의 음이 ‘듀’이거나 朝의 음이 ‘됴’라 하더라도 이는 ‘돌’과는 좀 거리가 먼 글자였는데 왜 굳이 朝를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혹 朝의 옛음가에 ㄹ받침이 들어갔던가?
여기서 우리는 주변국가의 이름에서 朝鮮의 음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金(금)의 원래 국호는 朱申(주신)이며 또한 朱里眞(주리진)이라고도 한다. 里로 표기되는 발음은 중국인들이 자기네들 글자로 표기할때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朝鮮이란 표기도 그 중간에 里와 같은 ㄹ발음이 빠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다면 朝鮮도 ‘됴센’도 ‘됼센’ 또는 됴리센’으로 읽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며 이는 곧 鳥白의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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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ww.sejong.or.kr의 ‘닭’에 대한 풀이 참조




2005-05-10

장대

치켜세운 장대 끝을 하늘에 두고

바람에 씻기우고 싶다

비닐덮어 띄우는 거름 속 같은 시간의 흐름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시간임이 진작이였지

이백년이언들 이틀에 앞선 때와 다르지 않는 건
이십년을 더한 세월일지라도 이틀 지남과 다르지 않으리

더하지 말고 버려라
내 인연의 끈을 갈기갈기 장대 끝에 두어
가는 곳 없는 바람에 맡기거라

썩을대로 썩어 뜬내조차 삭아버린
거름은 다시 흙이되고 나 마저 잊혀진 세월에
기억할 시공간은 장대 끝에 머무는 어지러움인가 보다



반구대


 

2005-05-07

오월의 신부

 산을 넘어서는 바람은 내내 운다

떠날 줄 알은 만남이지만
떠나는 기억속에 차마 부르지 못한 이름 있기에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면 아니 흐를 눈물일진대
후회하는 것이라면 아니 흘릴 눈물일진대
오월의 보리밭 위 하늘은 서럽도록 푸르구나

강을 거스르는 바람은 울지 않는다
사공이 띄운 배에 실린 몸이기에
불러도 돌아설 수 없지만 건너서도 돌아가지 않으리

약속할 수 없는 시간의 미련은 강물에 던지우고
맹세한 사람이여! 그 이름에 면사포 씌우고
오월의 신부는 입술을 깨문다



2005-04-25

황사(黃沙)

천년의 햇살에 바래고

물가자리 떠난 땅끝에
바람따라 흐른 오천년

손톱밑에 끼이고 얼굴 물들여 새기었거늘
한나절 빗줄기에 천년을 씻어내고
가람둑에 푸르름으로 그 아닌 듯
돌아서 홀로 돋는가

아니
맨몸으로 견딘 천년의 햇살로
푸르름을 뭍혀 다시
허덕이는 호흡이겠지



2005-03-13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우리 겨레의 글자 -한글- 우리는 한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오늘날 대부분의 책이나 교과서에는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상식은 정확한 것일까

이기문 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 한글 창제 무렵의 기록으로는 그런 증거가 하나도 없다.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 친제했다고 하는 것을 잘 모르는 시절에 그런 말이 나와서 모든 사람들한테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포가 된 것이죠.

여증동 교수 (경상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 실록에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백성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데 세종이 알면 무덤 속에서 통탄하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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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43년, 세종 25년의 일이다.

실록에는 이것에 대해, 매우 간략한 기록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는, 무렵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관료들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한글 창제를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를 대표로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 모두 일곱 명의 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집현전 소속으로 집현전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원로 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상소를 올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가 널리 펴려 하시니 그 옳음을 알지 못 하겠나이다.” 이들은, 상소를 통해 한글 창제가 세종의 독단적 행동이었음을 비난하고 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박종국 (세종기념사업회 회장)
⇒ 최만리도 훈민정음 창제한 것을 그때 안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면 그 전에 그런 기록이 없고 집현전이라면..부제학이라면 실제 실무담당 책임자다….미리 알았으면 그런 게 벌써 나오지 그때 나왔다는 것은 그분이 전혀 모르신 게 아닌가? 집현전의 최고 책임자였던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몰랐다면,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한글 창제에 간여한 것으로 알려진 학자는 정인지, 최항, 신숙주, 성삼문 등 모두 일곱 사람이다. 반대 상소를 낸 학자들이 원로라면, 이들은 대부분 젊은 나이로 소장학자에 속한다. 집현전 7학사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이름은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성현’의 용재총화 –
세종이 신숙주, 성삼문에게 명해 언문을 지었다는 것이다. 집현전 7학사 가운데서도 한글 창제와 관련해 가장 주목을 받는 학자는 신숙주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한글 관련 사업에 가장 많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신숙주였기 때문이다.

 

옮김(2007.3.13)출처 : KBS 역사 스페셜 DVD 리스트 100

신숙주는 외국어에도 능통했다고 알려져 있다. 치나어, 니혼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같은 사실도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 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제집에는,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숙주가 직접 쓴 글을 비롯해, 당대 학자들이 기록한 그의 일대기가 실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글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적고 있다. 신숙주가 한 일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서적을 편찬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신숙주가 요동에 다녀왔다는 기록이다. 그 무렵 요동에 귀양 와 있던 치나의 언어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신숙주가 황찬을 만난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 질문 한 것은 한글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 질문 한 것이 아니고, 한자를 바로 잡기 위해서 한자음에 관한 질문을 하러 간 것이다. 한자음에 대한 이론인 성운학에 관해 질문 하러 간 것이지, 한글을 만드는데 어떤 직접적인 조언을 얻기 위해 간 것이 아니다. 그 연도 등은 조선실록을 보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숙주가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으로 간 것은 언제일까?
조선 왕조실록을 검색해보기로 했다. 검색결과, 신숙주가 최초로 요동에 간 것은 1447년 1월. 한글이 만들어진 뒤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다.

이기문 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 실제 일은 성삼문 신숙주 또래들이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성삼문은 조금 전에 집현전에 왔고 신숙주는 세종 25년 말에 훈민정음이 창제됐는데 신숙주는 23년 즈음 집현전 학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니혼에 갔다. 그일에 관여할 시간이 없었다.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원로 학자들은 한글 창제 자체를 반대했고, 젊은 학자들도 한글 서적을 만드는데 참여했다는 사실만을 밝혀냈을 뿐이다. 결국, 세종 25년에 만들어진 한글 스물 여덟 자는 그들의 공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훈민정음에 관한 책 중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바로 이것이 세종 28년, 한글 반포를 위해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해례본은 한글의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쓴 이 책의 서문 가운데 한글을 만든 사람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전하 창제(殿下創制) – 전하가 지으셨다.

여기서도 훈민정음 스물 여덞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밝힌 것이다.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 신하들이 만들었는데 관례에 의해서 임금이 한 것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세종대왕 때 한글만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업도 많이 했는데. 그런 것들은 다 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공을 임금한테 돌리기 위해 했다고 하더라도 그 무렵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한글을 만든 것은 대단한 공이 아니고 해서는 안될 일을 임금이 하고 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공을 임금에게 돌리기 위해서 친제라는 표현을 썼다. 이건 전혀 근거가 없는 그런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최만리의 상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재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최만리 상소문) 그는 한글을 만든 것은 신기한 재주를 부린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혀 유익할 것이 없다고 혹독한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서 세종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너희가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설총이 만든 이두는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한 일을 그르다고 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반박하고 있다. 세종 스스로 한글을 만든 것이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종이 직접 쓴 글속에서도 한글 창제를 다른 사람에게 명해서 만들게 했다는 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은 훈민정음 서문의 글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글 스물 여덟 글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기문 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 친제라고 하는 표현은 훈민정음에서만 볼 수 있다.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훈민정음은 역시 친제다. 세종이 이것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여러 가지 학문적인 배경이나 능력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 역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가 되지 않나 생각한다. 세종은 어린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에 몰두해, 건강이 나빠지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아버지 였던 태종이 글을 읽지 못하도록 책을 모두 빼앗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세종은 이미, 왕자시절에 학문에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종국 (세종기념사업회 회장)
⇒ 세종께서 학문의 대왕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좋아했으니, 임금이 되어서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공부한다. 그분 말씀이 나는 경서가운데서 안본 책이 없다. 그 무렵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을 다 본 분이시다.

세종은 언어학에서도 조예가 깊었다.
가볍게 옛사람들의 운서에 터무니 없는 언문을 붙이면 되겠습니까? (최만리 상소) 한글로 운서를 번역하는 것에 대해 최만리 등의 학자가 그것이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자 이에 대한 세종의 반박은 단호했다.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또 너희가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인 줄 아느냐?
세종 스스로 언어학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세종의 반박에 대해 당대 이름난 학자였던 집현전의 학사들은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다.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 최만리라고 하는 분이 집현전 책임자로 다른 말로 당대 최고의 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당대 최고의 학자를 앞에 두고 당신이 이걸 아느냐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임금이라도 자신이 학문적 역량이 없으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게…

한글을 만든 직후 세종은 동국정운을 편찬하도록 명한다. 이것은 방대한 분량의 치나 음운값을, 모두 한글로 옮겨 적는 일이었다. 그런데 실무자였던 신숙주가 쓴 서문에 따르면 음 하나하나까지 모두 왕에게 직접 재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음운학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가 바로 세종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의 서문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상세하게 덧붙이라고 명했다.
즉,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스물 여덟 글자의 원리와 용례를 해석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스물 여덟 글자의 해석과 동국정운 등 한글 서적의 편찬사업에 관여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세종의 지시를 일일이 받아서 이루어 낸 일들이었다.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 세종이 임금이기 때문에 학자라고 하는 사실이 가려지는데 세종은 왕이면서도 아주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데 만약 임금이 아니었다면 언어학자라는 부분으로 세계사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을까? 워낙 많은 일을 하고 또 임금이다 보니까 학자라는 사실이 가려지는데 여러 가지 업적이나 기록을 보면 세종은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세종대에 이뤄진 한글 관련 사업의 최고 책임자, 그것은 바로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세종 자신이었던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싸고 떠도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 중 믿을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한 가문에서 구체적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고 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바로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관련된 것이었다.

안국승 (죽산 안씨 대종회 부회장)
⇒ 우리 어릴 때 들은 이야긴데 한글을 만든 다음에 민간에 실험시키는데 동원되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한글을 만들었다고 까지 이야기 되는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는 죽산 안씨 가문으로 출가한다. 그런데 이 가문의 족보에 시집온 그녀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안명국 (죽산 안씨 대종회 사무국장)
⇒ 족보를 보니까 여기에 기록과 같이 유사가 나오잖아.. 한글의 변음과 토착을 세종이 대군들에게 풀어라고 하니 대군들이 못 풀어서 세종이 정의공주에게 하명.. 정의공주가 변음과 토착을 풀어 올리니 세종이 극찬하시고 상으로 노비 수백구를 하사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정의공주가 해결했다는 변음과 토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이것이 민간에서 사용되던 언어나, 사투리 등이 아니었을까 막연히 추정해 볼 뿐이다. 한글 창제과정에서 정의 공주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은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 세종의 직계 가족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추진된 한글 서적 편찬 사업에도 왕자들이 깊숙히 개입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을 창제한 다음에 처음 실시한 사업이 바로 운회를 번역하는 것, 이 일에 왕자들이 동원된 것이다.

이기문 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 세종이 한글 창제과정에서 문종, 수양대군들과 상당히 서로 의견교환을 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세종 25년 말에 훈민정음을 공표하고, 그 다음해에..

두 달 뒤에 훈민정음으로 사업을 하는데 그 총책임자를 세자와 왕자를 임명했다는 것은 그들이 내용을 알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그때처음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이 참여했고 그 후 최만리의 반대상소가 나온다.

운회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한 왕자는 모두 세 사람…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와 수양대군. 그리고 안평대군이 그들이다. 이들이 번역 사업의 책임자가 된 것은 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들이 세종을 도와 한글 자모 스물 여덞 자를 만들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박종국 (세종기념사업회 회장)
⇒ 아들 세분이 세종 못지않게 학문, 글씨등에서 능가할 수 있는 분들이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는 세종과 문종이 같이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도 나오고 또 세종께서 대군들과 식사하시면서 대화를 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것으로 봐서…… 세조가 석보상절을 만들었잖습니까? 그게 그러한 것이 없으면 안되거든요.

문종과 관련해, 직해동자습이라는 책의 서문에, 재미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은 신숙주와 함께 한글을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되는 성삼문이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성삼문은 이 글에서 한글을 만든 것이 세종과 문종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을 뒷받침해줄 다른 기록은 없지만 한글창제에 왕자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세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있으니….그것은 바로 삼강행실도 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동기는 세종 10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진주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며 효자 충신 등의 사례를 담은 행실도의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는 내용과 함께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그림을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세종은, 글자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림만으로는 제대로 된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워 한다. 글자 창제의 필요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그리고 10년 뒤,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과 글자라는 단어가 다시 나타난다. 삼강행실도에 백성이 알 수 있는 글자를 붙이고 싶었던 세종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사업은 중단되고 훗날 성 종 때 이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한글 삼강행실도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다.

한글 창제는 세종이 신하들 몰래 자식들을 데리고 10여년간을 추진해 온 비밀스런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한글이 완성된 직후 세종은 큰 곤경에 처한다.
한글 창제를 찬성하는 이는 없는 반면, 가장 신임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만리 등의 학자들은 상소를 통해 왕의 행동은 사려 깊지 못한 일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한다. 이들의 태도와 어조는 매우 당당한 반면, 이에 대해 세종이 오히려 변명을 하는 형상이다. 어찌 옛날부터 쓰는 폐해 없는 글자를 고쳐 낮고 천하고 속된 말인 이익이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어 쓰겠습니까? 이들이 감히 세종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치나와의 문제 때문이였다. 만약 이 사실이 치나에라도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최만리는 걱정하고 있었다.

이기문 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 상식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학자들로선 그런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우리 나라는 치나의 한문으로 글자 생활을 했고 한문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한글을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필요치 않았고 이것은 오히려 오랑캐가 되려는 것이다고 반대하는 것이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나랏말이 치나와 달라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는 생각은 무렵으로서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치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대 관계에 있던 조선이 이미 쓰고있는 한문을 두고 따로 국어를 가진 다는 것은 치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증동 교수 (경상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령을 하면 하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남 몰래 만들 수 밖에 없어… 집현전 학자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 전하 절대로 안됩니다하고 반대할 터인데… 만약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면 한글 창제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같은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것이 바로 내불당 사건이다. 세종이 궁권 안에 법당을 지으려 하자 신하들이 대대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선다. 나라의 국교가 유교 즉 성리학인데, 왕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동잡록에는 무렵 신하들의 반대가 어느 정도 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집현전 학자들은 자신들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세종은 무렵 영의정이었던 황희를 붙잡고 “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무리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명분을 앞세운 신하들의 주장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한 한글창제는, 양반계층의 이익과는 상반되는 것이었기에… 반대는 더욱 거셀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 그 무렵 최만리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한문으로 글자생활을 하고 그것이 다른 서민들과 자신들이 구별되는 어떤 근거이기도 했기 때문에 굳이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글자를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자기 고유의 글을 가지고 있는 니혼이라든지 여진, 서하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대목을 보면 한마디로 말해 필요 없다..자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필요 없지만 세종은 그들 입장이 아니라 글 모르는 백성을 입장에서 보면 필요하다고 의견차이가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불당 사건 때와는 달리, 세종은 반대론자들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대처한다. 반대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을 전원 하옥 시키면서까지 한글의 사용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한글 창제 전에 이 사실이 신하들에게 알려졌다면 한글은 탄생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무렵의 명분에는 어긋나는 한글창제, 한글은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 뒤에 비밀작업으로 이루어낸 업적이었던 것이다.
한글과 가장 닮은 글자?

니혼 남단에 위치한 시코쿠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의 어귀엔, 이상한 글씨의 비석이 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가, 한글의 기원과 관련해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비석에는… 마치 한글을 풀어 쓴 듯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니혼에서는 이 글자를 신대글자라고 부른다. 니혼에 한문이 들어오기 전인, 신대에 사용하던 글자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학계에서는 이 글자들이 바로 고조선의 글자가 니혼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신대글자는 현재, 니혼 전역에 흩어져 있다. 주로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 등에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분포지역만도 백여군데가 넘는다고 한다.

한글과 꼭 닮아 있은 이 글자를,
니혼 사람들은 어떻게 발음하고 있을까?

비문 읽는 신주 – 정식으로는 가무나가라 입니다.
놀랍게도 이 글자는 한글과 똑같이 발음되고 있었다.

니혼 사람들은 신대글자를 과거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글자라고 여겨, 매우 신성시 여기며 숭배하고 있다. 일부 신사에서는 이 글자 자체를, 신대신 모시는 경우도 있다. 신대글자에는 그 자체로도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도 신대글자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적이다. 신사에서 만드는 부적에는 지금도 신대글자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대글자의 흔적은 비석 청동검, 청동거울 등의 물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자가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하는 점이다. 한글 이전에 있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신대글자를 최초로 소개한 것은 1800년대 초반에 출판된 신자일문전을 통해서 였다. 매우 여러 종류의 신대글자들이 소개돼 있는데,

신대글자는 이 책의 저자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의심을 받고 있다.
김문길 교수 『 니혼의 고대문자연구(형설출판사)』
⇒ 신대글자를 보고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국어국문학계 뿐만 아니라, 니혼의 국어국문학회에서도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훈민정음 즉, 한글을 니혼 국학학자들이 조작하고 짜집기하여 전쟁 이전까지 인정해왔다고 자인하고 있는 실정고, 니혼의 신도교에서는 신대에 있었던 말씀 즉, 신이 주신 말씀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신대글자를 둘러싸고 진위논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 나라의 부적 속에도 고대 글자가 씌여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는 부적의 문양 속에서, 한글과 유사한 글꼴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읽을 수 없지만… 물을 세 번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김민기 (부적 연구가)
⇒ 부적 속의 글자는 우리 조상들이 쓰던 글자고…왜 부적에 그런 글자가 남았냐면 하늘님을 부르거나 북두칠성을 부르려고 할 때 …….그 조상신이 알던 글자를 써야 아니까 조상들이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글자로써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 나라에 고대부터 글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옛날부터 있어 온 것이다. 연대가 의심되는 책?? 속에서는 고조선 때 사용되던 글자라며 신지글자라는 것이 소개돼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신지글자의 글꼴도 부적 속에서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는, 남해 양하리에 있는 바위그림을 일러 고대 우리 선조들이 쓰던 그림글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 이 부적이 삼국시대 이전이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여러 사실들로 미루어 살펴 보건데 위의 부적 또한 한글창제 이후의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기호의 모양으로서 닮은 점을 찾는다면 세상의 모든 글자와 기호들에서 한글과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한글은 기하학의 기본이 되는 수직/수평/점(세모,네모,동그라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주장들 가운데, 가장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환단고기라는 책 속에 소개된 가림토 글자다. 모두 서른 여덟 개로 이뤄져 있는데, 글자 모양이 한글과 매우 비슷하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한글은 이 글자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이 가림토 글자가 실재 존재했으며 그 물증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림토 글자의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는 이 탁본. 이 탁본의 글자가 과연 고조선 시대, 우리가 쓰던 글일까?

이 탁본의 원래 소장자는 이상백 교수의 소장품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 탁본 했다고 한다. 이상백 교수가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한글의 어머니 글이라고 말했다고 듣고 있다. 탁본을 살펴본 결과, 그 가운데는 한글과 유사해 보이는 글꼴들도 더러 있었다.

정말 이것이 가림토 글자, 혹은 원시 한글의 흔적일까?

동아시아 고글자를 연구하는 송기중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이 글자에 대해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이것은 가림토가 아니었다. 이미 해석까지 어느 정도 완료된 투르크 글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투르크 글자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소리글자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지금 얘기한 투르크족들이 쓰던 글을 12세기말에 몽고족들이 받아들여 썼던 걸 16세기 말에 만주족이 써서 만주글로 써서 그러니까 이건 만주글이다.
이처럼 동북 아시아에서는 치나의 뜻글자 외에도 독자적인 소리글자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이다.
우리겨레와, 언어학적 계통을 같이하는 이들… 그렇다면 우리 겨레에게도 소리글자의 전통이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 신경준이 쓴 훈민정음 운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사용하던 속용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일정치 않고 그 꼴의 법칙 또한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한문 외에 민간에서 사용되던 글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만약 세종무렵 이런 민간 글자가 있었다면,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던 세종이 이 글자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방고전에 대해서는 그 어느 기록에서도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세종이 참고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다.
기역 니은 이라는 이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훈민정음 해례가 발견되면서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이 밝혀진다. 한글의 글자꼴이 무엇을 본떠 만든 것인지 이 책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섯 개의 기본음은 발음기관의 생김새에서 본떠 만들었던 것이다.

이현복 교수 (서울대 언어학과)
⇒ 글자가 왜 ㄱ과같은 모습을 가졌난 말야.. 그건 발음을 할 때 혀의 모습이 ㄱ의 모습을 가졌다. 그건 인류공통이다. 흑인동양인 할 것 없이 다 그렇게 발음해야 한단 말이야… 그게 독특한 것이고 유래가 없는 일이다.

한글의 글자꼴이 발음기관의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한 것인지, 실험해 보기로 했다. 이것이 맞다면, 세종은 이미 500년 전에 발음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해례의 설명 그대로 였다. 나머지 글자들도 모두 해례의 설명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 외의 글자들은 매우 간단한 획을 더한다 원칙에 의해 만들어지도록 했다.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삼고, 소리가 강해지면 기본자에 획을 더하면 된다.

여기서 기본글자를 만들고 하나를 더해서 ㅋ를 만들고, 여기서 하나를 더해서 ㄲ를 만든다. 보면 기본글자가 다 있잖아, 이걸 보면 누구나 이거 하나를 배우면 세 개를 금방 알게 되는거지… 하나 배우면 열을 안다는 옛날 속담이 여기서 실현된 것이지…

사람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는 다섯 가지 기본음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한글의 기본글자를 이루게 된다. 이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삼고, 획을 추가해 글자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동일한 계열의 소리는 동일한 글자꼴을 갖게 됨으로써 한글은 소리와 모양이 일치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글자가 되는 것이다.

권정선 교수 (대구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
⇒ 세종의 한글시대에 오면 세종이나 학자들이 음운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거든.. 소리 낼 때 혀와 입술이 어떻게 난다는 것을 잘 알지.. 실제로 우리 한글이 고도로 발달된 글자라는 것은 고도로 발달된 음성지식이 있고 난 뒤에 만들어진 글자란 뜻이다.

가림토든, 신대글자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이 해례본을 뒤엎지 않고서는 그 이야기들은 그저 이야기들일 뿐이다.

한글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는 어떨까?

세계적 과학잡지, 디스커버리는 지난 94년 7월호에 글자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 글은, 한글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자. 그리고 최상급의 표현을 써서 한글을 극찬하고 있다.

다른 글자와 비교해도, 한글의 우수성은 탁월한 것이다. 어메리커에서 한글을 연구하고 있는 레드야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글자의 사치품! 세계 글자사상 가장 앞선 글자, 그것이 바로 한글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글자의 사치, 그것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 언어학자 세종의 외로운 노력이 가져다 준 고귀한 선물이었다.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비록 오랑캐가 된다 하더라도 백성이 글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의지. 한글창제는 극소수 양반층만 누리던 글자의 특권을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준 세종의 거룩한 글자 혁명이었다.

2005-03-09

2005-01-12

겨울

 춥다


북해의 기운으로 살아온 무리들이 잊은

오랜 기억으로 들춰낸 바람이

출근길 아스팔트 위에서 눈보라를 잠시 맨들고

귀때기 씨리고 콧물이 알싸한 바람에

뼈골이 시원함이야

수천의 시간에 덕지덕지 붙은 잡스러운 것들을

턴다


봄이 드는 때에 이르러….



2004-11-20

저녁

 다시금 때는 저물고

못다한 인연 끈이 노을에 붉어질 때

나는 너를 돌아본다


어둠이 오고

가녀린 인연마저 닫히는 때

나는 너를 불러본다


때에 이르러 너는

내 알지 못하는 흐름에 끝간 데 없을 뿐

나는 가는 것이 없다  



2004-11-01

학교에서 1

강어귀 들판부터 한두 조각 비어내는 들판은

십일월 초하루의 햇살에 무르익은 가을을 동아리듯

허전함 빚고


간밤에 제 몸을 다 떨어

좁은 운동장을 노랗게 물들인 은행나무 아래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잦아들고


퇴근무렵

하루를 마감하는 녹녹함 보단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바람처럼

허허로움만 길게 뉘인다



2004-07-04

라면물 얹어놓고

라면물 얹어 놓고 무얼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라면물 얹어 놓고 무얼 할 것이가를

왜 생각하는 것일까

 

시간이라는 반성은 다시 풀어지고

아무것도 걸러지지 않는 손가락 사이로

또 하루를 걷어야 하는 이밤

아무것에도 뉘없어 못 잠드는 시간되고

라면물 얹어 놓고 무얼 해야한다는 생각은

라면물 끓는 때 마져 잃어버려

 

라면물 다시 받아 얹는다.

라면물 끓을 때까지

나는 숫자를 헤며 기다린다.

하나,두,세,네,아홉,스믈,서른아홉

마흔에

라면 물끓임으로 기다림은 얼마일까..

다시 라면물은 쫄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