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30

2005-09-20

2005-08-18

독도 연표

 지증왕 13년(512년)
  여름 6월 하슬라주 군주인 이찬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을 항복시켜 귀순하고 토산물로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다.

 고려
  – 태조 13년(930년)
  사신을 보내 토산품을 바친 기록

  – 현종9년(1018년) 11월
  동북 여진인 우산국을 칩입하여 농업을 작폐하게 되자 임금이 농기구를 내린다.
  1019년 여진인의 침략을 받고 피난해와 있던 울릉도인들을 울릉도로 돌려 보낸다
  * 1019년 대마도,이키섬에 여진인(50여척배 3,000명)들 침입하여 남자 44명, 승려 168명, 여자 59명 아이들 29명 살해하고 여자 239명 납치함.

 – 의종 13년(1509년)
   명주(지금의 강릉) 도감창 김유립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조사

 – 고종 30년(1243년)
  최이가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주민들을 이주시켜 정착케 하다가 중도에 그만둠
  국학학유인 권형윤과 급제 사정순등을 울릉도 안무사로 파견

  고종 33년(1246년) 5월 울릉도에서 대장경 판목을 구함

 조선
  태종 3년(1403년) 강원도의 무릉도(울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함(소개령)-공도정책 
  태종 7년(1407년) 대마도주 종정무(소다시게)가 일본인들을 울릉도에 이주하여 살게 해달라도 간청하나 거절함
  태종 16년(1416년) 김인우를 무릉등처 안부사로 파견하여 현지 실사 공도정책(섬을 비워두는 정책) 시작
  세종 7년(1425년) 김인우가 부역을 피하여 울릉도로 도망간 남여 20명을 잡아옴
  세종 20년(1438년) 울릉도민을 본토로 완전히 이주시키고 빈섬을으로 둠(공도정책 실시)
    – 3년에 1회 수토정책으로 울릉도를 파견 조사

 일본
  – 에도(江戶)시대
    1614년 덕천(도쿠가와)막후의 지시로 의죽도(이소다케시마_강원도와 경상도 경계에 있다하며)를 탐견(크기,지형 조사)하려고 동래부사에게 길 안내해달라고 서계(문서)를 가지고 옴.

 1693년 안용복 사건
1693년 여름 폭풍으로 울릉도 표류하니 울릉도에 대마도 왜인들인 진을 치고 있었으며, 왜인들은 울릉도를 죽도(다케시마)라고 불렀으며, 일본 산음도 호키슈(지금의 시마네현)에 속한다고 우겨 안용복을 오히려 국경을 침범하였다고 대마도로 잡아감서 대마도 태수와 면담하여 대마도 태수는 안용복을 반박에 안용복을 호키슈(시마네)태수에 보내어지고 호키슈 태수는 안용복의 설명에 수긍하여 막후 관백에게 보고하고 , 막후 관백은 안용복에게 동래부사에게 전할 서계를 준다. 안용복이 히젠번에 당도했을 때 히젠번주가 안용복의 서계를 뺏앗아 버리고, 대마도로 보낸어 대마도 왜구들은 안용복을 90일동안 감금시켜 놓고 동래부에 울릉도를 자기들 죽도라고 떼를 쓴다.
안용복은 감금상테서, 몰래 동래부에 감금사실을 알려 동래부사는 왜관에게 안용복을 풀려나도록 한다.
돌아온 안용복은 조정에서 울릉도 관리를 철저히 하기를 요구하려하나 동래부사는 조정에 보고조차하지 않아, 안용복을 직접 울산에서 13명의 사람을 모아  울릉도로 가서 왜인들을 쫓아낸다.
안용복은 왜인들을 쫓아 호키슈(시마네)까지 달려가 다시 호키슈 태수를 만나 대마도의 농간을 폭로하고  호키슈 태수가 에도에 안용복의 폭로사실을 전하려 하니, 대마도 태수가 자신의 징계를 두려워 간청하여 에도에 전하지는 못하고 대마도 태수로부터 ‘감히 다시는 대마도 사람들을 울릉도에 보내지 않겠다’는 편지를 동래부로 보내왔다.

  1696 에도막후 죽도(울릉도)에 일본어선 왕래를 금지함을 조선 조정에 알림

  한국
1700 삼척영장 장한상의 수토제 실시중 현재 독도에 대한 위치와 방향을 ‘울릉도사적’에 묘사함
1700 정상기의 ‘동국지도’에 독도를 우산국으로 위치와 거리를 정확히 표기함
1794년경부터 독도를 가지도(可支島)라고 부름(정조실록(正祖實錄))
1849년 프랑스 포경선(捕鯨船) 리앙쿠르호(Liancourt號)에 의하여 리앙쿠르암초(Liancourt Rocks)로 부름
1854년 러시아 군함이 독도의 서도를 올리부차(Olivoutza), 동도를 메넬라이(Menelai)라고 부름
1855년 영국 군함 호네스트호(Hornest號)에 의하여 측량되어 영국의 해도(海圖)에 호네스트암초로 기재

고종 18년(1881년) 울릉도 수토관원인 무단벌목하던 왜인 7명 적발
고종 19년(1982년) 이규원검찰사 울릉도 파견 조사-공도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엔 180여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음
고종 19년(1982년) 일본인 울릉도 무담칩임과 살림벌채 금지를 일본 외무성에 요청
1883년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겸포경등자사로 임명하고 울릉도를 공식적으로 개척(공도정책 폐기)
1895년 수토정책 폐지하고 
전임도장제 실시
1898년 울릉도를 지방관제로 편입
1899년 12월 내부시찰관 
우용정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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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10월 25일(광무4년) 칙령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
군청위치는 태하동으로 관할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을릉도 동북쪽 본섬과 2.4KM떨어진 섬),
석도(石島; 지금의 독도)를 관할
함.

  勅令 (칙령)

勅令第四一號 (칙령 제41호)

鬱陵島를 鬱島로 改稱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한 件 (울릉도를 울도로 이름을 바꾸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

第一條 鬱陵島를 鬱島라 改稱하야 江原道에 附屬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하야 官制中에 編入하고 郡等은 五等으로 할事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소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중에 편입하고 관등은 5등으로 할 일)

第二條 郡廳位置는 台霞洞으로 定하고 區域은 鬱陵全島와 竹島石島를 管轄할 事
(제2조  군청위치는 대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석도를 관할할 일)

第三條 開國五百四年八月十六日官報中 官廳事項欄內 鬱陵島以下十九字를 刪去하고 開國 五百五年 勅令第三十六號 第五條 江原道二十六郡의 六字는 七字로 改正하고 安峽郡下에 鬱島郡三字를 添入할 事
(제3조 개국504년8월16일 관보중 관청사항란에 울릉도 이하 19자를 삭제하고, 개국505년 칙령 제36호 제5조 강원도26군의 ‘6’자는 ‘7’자로 개정하고 안협군밑에 ‘울도군’ 3자를 추가할 일.)

第四條 經費는 五等郡으로 磨鍊하되 現今間인즉 吏額이 未備하고 庶事草創하기로 該島收稅中으로 姑先磨鍊할 事
(제4조  경비는 5등군으로 마련하되 현재 이액이 미비하고 서사초창이므로, 이 섬의 세금에서 먼저 마련할 일 )

第五條 未盡한 諸條는 本島開拓을 隨하야 次第磨鍊할 事
(제5조   미진한 여러 조항은 이 섬을 개척하면서 차차 다음에 마련할 일)

附則 (부칙)
第六條 本令은 頒布日로부터 施行할 事
(제6조  본 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일)

光武四年十月二十五日 (광무4년 10월25일)

御押 御璽 奉 (어압 어새 봉)

勅 議政府議政臨時署理贊政內部大臣 李乾夏(칙 의정부의정임시서리찬정내부대신 이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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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까지는 독도의 인식보다는 울릉도에 관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독도가 울릉도의 딸린 섬이라고 생각하는 건 한국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며,
일본의 입장에서는 울릉도와 별개의 섬으로 인식하거나 오히려 일본에 딸린섬으로 인식하는 견해차이가 있어

울릉도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과 증거는 독도의 직접적인 영유권 주장에는 설득력이 약하다도 본다.

 

독도에 관한 영유권의 확고 부동한 증거는 1900년 대한제국의 칙령에 의한 관할한 증거이며

이 당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침략을 당하는 과정에서 침략자가 점령하여 자신의 소유로 하였기에

독도를 자신들의 영유권으로 보는 것은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을 뿐더러 언제든 기회가 되면 다시 침략을 시작하겠다는 

의지로 보아야 한다.

일본은 비록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였고 그 댓가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나, 거기에서도 독도는 명시하지 않음으로서

한반도의 지배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이다.

만일, 일본이 한국에 의하여 패망하여 전쟁 배상을 한국이라는 당사자와 했더라면 이러한 분쟁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100여년전 한국을 침략하고 점령하였으나, 점령지의 주된세력의 저항에 의하여 패망한 것이 아니며,

점령지와는 상관없는 연합군의 강요에 의한 점령지의 관할 포기이지, 점령지의 주된세력에게 점령지를 돌려준 적이 없다.

 

그리나, 실질적인 국가의 실체로 오늘에 이르는 우리는 우리의 영토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

국제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누락된 독도의 관할권 표시에서 출발된다.

분쟁의 씨앗은 이 조약에 있으며,

이 조약을 국제적인 조약으로 인정을 하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가슴아픈 조약이라 하겠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의 관할권을 논하면서 한반도의 주된세력은 논의에 참여되지 않은 조약….

강대국들의 전리품 분배와 같은 조약에 우리는 그 전리품으로 취급된 조약이다.

 

독도문제의 영원한 종결을 위하여서는

일본이 전쟁의 승자인 연합국과 맺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별개로 하고

한국과 일본의 영토 관할에 대한 명확한 조약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고 본다.

 

1904.8.23. – 조일의정서에 의거 – 독도에 – 일본 해군부대 설치 ( ★ 해양침략의 첫발)
1905,2, 일본은 독도에 망루와 통신시설 설치
1905.2.22 시마네현 량고도(독도)영토 편입 결정(시마네현 고시 제 40호)
1904.9.29 나카이(일본인) – 량고도 영토편입 병이 대하원(리앙쿠르(독도)도 영토편입 후 임대해 줄 것 청원) 내무대신, 외무대신, 농상무대신 앞으로 제출
1905.1.10 일본 내무성 – 무인도의 소속에 관한 건을 내각에 상정
1905.1.28 일본각의-내무부의 위 안건을 결의
1905.2.15 일본 내무성 제 87호 각의의 결정을 관내 즉 시마네현에 고시하도록 시마네현 지사에게 지시
1905.2.22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로 발표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 북위 37도 9분 30초, 동위 131도 55분 은지도(오키시마)로부터 서북 85리에 있는 섬을 타케시마라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은기도사 소관으로 정한다. 명치 38년 2월 22일”
1905.5.3 시마네현지 제 90호 – 은지도청에 대하여 죽도 면적을 조사보고할 것을 지시.
1905.5.17 은기도사 -시마네현 소영무길에게 죽도면적 “23정 3반 3묘보”를 보고.
1906.4.30 일본의 “죽도 어렵합자 회사”란 회사가 일본 시마네현 지사에 독도 임대를 신청함.
1906.7.2 일본 시마네현에서 “죽도 어렵합자 회사”에 임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독도’라는 이름은 처음 사용됨(현재까지 발견된 문헌 기록중)
1907년 경삼남도 울도군으로 편제
1910년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 한국수산지는 일본인이 주도하여 작성된 문서임)
1914년(일제)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독도를 경상북도에 편입되었고
1914년 경상북도 울도군으로 편제  (일제 강점기의 일본의 통치기간에도 한국 지방행정구역에 편제한 것은 한반도에 딸린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임)

1945. 포츠담 언 제 8항에서 일본국 주권이 미치는 영역을 명시하고,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SCAPIN 677호 3항에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영도에서 제외한 섬으로 명기
1946.6.22 SCAPIN 1033호로 지정해 독도와 독도근해 12해리 이내에 일본 선박 접근 급지시킴
1948.6.8(화)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삼은 미공군기(오키나와발 B29)에 의해 울릉도 어민 사상자 발생 선박 30~80척 침몰, 어민 30~100여명 사망
195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중국,대만,남한,북한은 회담에 초청되지 않음 에서 일본측 고문인 ‘시볼드’에 의해 제6차초안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명기 요구하고
미국 국부무는 독도를 명기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5차초안까지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들은 독도를 한국령 명기하는 걸 찬성하였으나
6차 초안 미국의 독도를 일본령으로 명시한 것은 뉴질랜드,영국이 미국의 수정안에 동의하지 않아 최종 결의안에는 독도를 일본령도 한국령도 명기하지 않고 조약이 체결되었다.

  1951.6.8 독도의 서도 자갈밭에 경상북도지사와 울릉도민이 1948년 희생자 위령비를 세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들에 의해 쇠망치로 부수어 물속에 던져짐.

1952.7.6 연합군 총사령부 SCAPIN 2160호 지령으로 독도를 미군 해상폭격연습지로 지정
1952.9.15. 미군기 독도에 폭탄 4발 투하(인명피해 없음)
1952년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사 독도를 기점으로 평화선을 선포함
1953. 4. 27 울릉도 주민(33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대장 : 홍순칠)
1953. 6.25,27,28 3차례 일본인들이 독도에 상륙하여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영토 표시
1953. 7.8 한국 국회에서 일본인 독도 침범에 대한 결의문 채택, 경상북도 의회도 항의결의서 채택
1953.9.17 일본수산시험청 소속 선박 1척이 독도 침입
1954.5.18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표시판 철거하고 바위면에 ‘한국령’새김_작업중 일본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독도의 서도 북서족으로 접근하다가 한국 해안경찰대로부터 10여분 총격을을 받고 물러감.
1954년 항로표지(등대)설치. 같은해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4.9.15 독도 우표 3종 발행
1956년 4월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독도의용수비대로부터 인수 결정
1980년 최종덕 독도 전입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와 주변 12해리가 한일간 ‘중간수역’ 안에 위치하게 됨
1999년 문화재청 고시 제 1999-1호(6.1)로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관리지침 고시
1999년 문화재청 고시 제 1999-25호(12.10)로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천연보호구역’으로 변경
2000년 독도 주소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37번지로 변경
2003년 독도에 우편번호(799-805) 부여
2005년 3월 독도관리기준안(기존 독도관리지침 폐지) 및 독도(동도)개방 

백두산 정계비 설치

 청 황실은 선조의 발상지로 영산으로 여기는 백두산을 청의 영역 아래 두고자

서기 1677년 청(淸)조 강휘제 16년 내대신 우무누[武默訥(무묵눌]로 하여금 백두산을 답사하도록 함.
서기 1684년 청은 변장,러추(勒楚)로 하여금 압록강 상류를 통한 백두산 답사를 하도록했으나
답사도중 조선인에게 함부로 총질하다가 도리어 총에 맞아 부상을 입어 답사가 실패로 돌아감.

목등[穆克登(목극등)]의 백두산 탐사
서기 1712년 2월 우라총관(오랍총관) 묵등(穆克登) 일행 백두산 탐사에 조선이 동반협력해 줄것을 요구하여, 조선 의정부우참찬 ‘박권’을 접반사로 하고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가 압록강 상류에 있는 후주(厚州)에서 이선부 일행과 만나고, 5월4일 혜산진에 도착하여 조선 접반사 박권 일행과 만나서 백두산으로 출발하여 5월 11일 백두산 천지에 도착하였다.

정계비 건립
묵등 일행은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오면서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인정되는 분수령에다가 주변을 더 살펴보고 경계비를 세우기기로 하여 1712년 5월 15일 정계비를 세웠다



——————————-
대 청
오라총관목등극봉
지사변지차심시서위압록동
위토문고어분수령상늑
석위기
강.희오십일년오월십오일
필첩식소이창통관이가
조선군관이의복조대상
차사관허량박도상
통관김응헌김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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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총관 목극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변방의 경계를 직접 조사하고자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 그러므로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로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 51년 5월 15일
필첩식(글쓴이)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군관 이의복 조대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

2005-08-15

백두산 정계비 주변지리(구글위성)

 

▣ 정계비 위치

■ 백두산 천지 주변 지리

■ 백두산 전경

2005-08-04

‘조·중 경계〓토문강’ 확인(조선일보)

 


고구려재단, 백두산 정계비터 찾아내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이 국경 확정을 위해 세운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를 한국 학자들이 확인했다. 현장 확인 결과, 정계비에서 두 나라의 경계라고 밝힌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松花江) 지류임이 분명해졌다.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金貞培)은 3일 지난달 19일부터 30일까지 북한 학자들과 북한 내 고구려 유적을 공동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며 “백두산 등반길에서 정계비가 있었던 곳을 확인했다”며 사진을 공개했다.

정계비 터가 있던 곳은 백두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주차장의 군 초소 뒤편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정계비를 세워놓았던 받침돌과 북한이 1980년 그 옆에 세운 글자 없는 흰 비석(높이 45㎝)이 있었다. 김정배 이사장은 “주차장 근처에 정계비 터가 있다는 증언과 주변 지형, 중국어판 북한 지도에 천지에서 동남쪽 4㎞ ‘백두산 사적비’로 표기된 지점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조사에 참여했던 고구려연구재단 배성준 연구위원은 “정계비 터에서 동쪽으로 바라봤을 때 송화강의 지류인 마른 물줄기가 보였고,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紅土水)와 석을수(石乙水)는 전방의 대각봉(大角峰) 너머에 있었다”고 말했다. 백두산 정계비는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土門)으로 경계를 삼아 그 분수령에서 돌에 기록한다”고 쓰여 있었으나 1931년 만주사변 때 없어졌다. 중국은 토문강이 두만강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백두산 정계비가 있던 자리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광경.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는 토문강(송화강 지류·점선)의 마른 물줄기만 보일 뿐 두만강 상류는 대각봉(가운데 산봉우리)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가의 분수령에 세워진 것이다. 작은 사진은 북한이 정계비터에 새로 세워놓은 비석.

2005-08-03

백두산 정계비터 정확한 위치 찾았다

 [오마이뉴스 2005-08-03 15:35] [김태경 기자]

▲ 북한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터 표지석. 검은색 돌은 지난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사용했던 주춧돌로 보인다. ⓒ2005 고구려연구재단


▲ 백두산 정계비터에서 바라본 토문강의 흔적. 가운데 빨간 색 타원 안이 토문강이 흘렀던 곳으로 추정된다. ⓒ2005 고구려연구재단

광복 뒤 처음으로 백두산 정계비터의 위치가 남측 학자들에 의해 확인됐다. 그동안 남한 내에서는 정계비터의 정확한 위치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지난달 19일부터 30일까지 방북해 북한 학자들과 고구려 유적 공동 조사를 벌였던 고구려 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 측은 이번 방북 기간 중 백두산 동남쪽 4㎞ 지점(해발 2200m)에 있는 백두산 정계비터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고 3일 밝혔다.

 백두산 정계비는 지난 1712년 세워졌으나 지난 1931년을 전후해 일제가 철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광식 재단 상임이사는 “백두산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는 주차장 모퉁이 북한군 초소 뒤에 백두산 정계비터가 있었다”며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등정한 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북한군 초소 뒤에 있는 이 정계비터를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재단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 사용했던 주춧돌이 있고 그 위에 북한 당국이 지난 1980년 세운 흰색 비석이 있다. 일종의 표지석같은 이 비석에는 아무 설명도 없어 그냥 봐서는 백두산 정계비터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고구려 연구재단의 배성준 연구원은 “북한에서 출판한 중국어판 백두산 안내서에도 이 곳을 ‘백두산 사적비’라고만 했을 뿐 정계비터라고 표기하지 않아 직접 설명을 듣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1962년 중국과 국경 협정을 맺은 국경선을 확정한 북한 당국이 간도 문제 등 민감한 문제가 얽혀있는 백두산 정계비터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최 이사는 “그러나 초소에 있는 북한군들은 모두 이 비석이 백두산 정계비터를 확인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배 연구원에 따르면, 백두산 정계비터를 보면 원래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져있던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라는 말의 뜻을 알 수 있다.

 즉 백두산 정계비터에서 볼 때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며, 동쪽으로는 토문강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 청나라는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고 주장했으나 두만강의 발원지는 백두산 정계비터 앞쪽에 보이는 대학봉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토문강은 송화강의 한 지류다.

 안악 3호분 등 남쪽 학자들에게 처음 공개

 이에 앞서 지난 3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는 여러가지 자료 등을 토대로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주차장과 북한군 초소 부근에 정계비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재중동포들이 제작해 지난 1997년 9월 14일 KBS가 방영한 <일요스페셜> ‘최초공개 북한에서 본 백두산’에서도 정계비의 주춧돌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남쪽 학자들이 백두산 정계비터의 모습이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이번 남북 공동조사에서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원들은 덕흥리 고분, 수산리 고분, 안악 3호분 등에서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유리벽 안에 들어가 직접 벽화를 촬영했다.

 고분 벽화 사진을 촬영한 김진순 연구원은 “이제까지 공개된 고구려 벽화고분 사진은 그리 자세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자세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이번 조사에서 그동안 알려진 ‘강서 소묘’의 도면이 잘못된 것을 확인했다. 강서 소묘의 도면은 일제 시대 때 잘못 제작된 도면이 이제까지 그대로 통용되어 왔으며 북한 학자들도 이 사실을 몰랐다. 안악 3호분·태성리 3호분·인민 대학습당 부근의 평양서 각석은 이번에 처음으로 남측 학자들에게 공개됐다.

 김정배 이사장은 “이번 조사는 광복 뒤 처음으로 이뤄진 고구려 유적 남북 공동조사였고 새로운 성과도 있어 고대사 연구에 새 계기를 마련했다”며 “우리 재단은 이번 공동조사에서 남북 학자간 주고받은 논의 내용을 정리해 앞으로 남북 공동 학술토론회로 연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안악 3호분의 무덤 주인공을 놓고 중국의 망명자인 ‘동수’설과 ‘고국원왕’설(북한 쪽 주장)이 맞서고 있다. 북한 쪽은 특히 이 문제와 관련한 공동학술토론회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경 기자

2005-05-18

조선(朝鮮)』의 유래(어원)

 1. 통설

‘ 아침의 신선함 ‘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알고 있음( 지나(중국)중심의 얕은 생각임 )
2. 문헌 및 각설
1) 최초 문헌 등장
《관자(管子): 춘추시대 BC8~7 제(齊)나라 ‘관중(管仲)’이 지음-주된내용은 BC403~221에 추가됨》경중편에 하나의 “지명”으로 ‘조선’이 언급됨.
2) “조선에는 명칭은 열수(冽水)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冽水),산수(汕水)라는 3개의 강이 있다. 이강들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AD3C 위나라 장안(張晏)
3) 동쪽의 해 뜨는 곳에 거처함으로 조선이라고 하였다-신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군명(郡名)조
4) 조선의 음은 조선(潮仙)이다. 물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동사강목:안정복》〈잡설〉‘조선명호’ 인용《국조보감》
5) 선은 밝은 것이다. 땅이 동방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므로 고로 조선이라 했다.-《동사강목:안정복》〈잡설〉‘조선명호’ 인용《조선고이》
6) 신채호.정인보 설
《만주원류고:1777》에 근거하여 만주어의 “주신(珠申,州愼)”과 비슷한 말로 풀이하여, 《만주원류고》에서 ‘주신’을 ‘소속(所屬)’으로 풀이하듯 ‘관경(管境)으로 풀이하고 ” 주신->숙신, 조선 ”
7) 리지린(북학학자) 설- 숙신족(현 만주 동북-사할린 지역 여진족의 명칭으로 통설됨)종족 명칭에서 유래.
8) 기타 설
아사달->아사+달(아침의 땅)-[한자의역]조선(朝鮮)

3. 내생각
1)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바꾸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는 할 때 화령(和寧:영흥의 옛 이름)과 ‘조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 사실이 있는 것은, 먼저 ‘화령’은 자신의 출신지명을 따온 것이고 ‘조선’은 자신이 세운 나라 강역의 옛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보통 옛 나라이름을 따올 경우, 시대적으로 뒤에 오는 나라이름은 ‘뒤(後)’ 또는 ‘새(新)’라는 접두사가 붙기 마련인데, 그러한 접두사가 없이 옛이름을 바로 가져다 쓴 것은 고려말까지만 하더라도 옛 조선(고조선)을 당시의 왕조국가 형태의 나라(국가)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반증이기도 하며, 당시국가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연맹체의 국가나, 지역을 지칭하거나, 종족을 지칭하는 형태의 ‘조선’이 있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 명칭으로 대변 되는 ‘지역(강역)’ 또는 ‘종족(민족)’이 당시(조선 건국)의 주류세력가 일치한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2) 《삼국유사》〈기이편〉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乃 往二千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霧葉山亦云白岳在白州或云在關城東本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여(산해경엔 무엽산이라 했고, 또 백악이라고 했으니 백주에 있다. 달리 관성 동쪽에 있다 하니 백악궁이라)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니 요임금과 같은 때라」
현존하는 삼국유사는 1512년에 간각된 경주판으로 조선중기 판본이기에 古朝鮮의 ‘古’를 붙이고 ‘왕검조선’이라고 표기한 건 1512년 당시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함이라 보여진다. 김부식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1281년)에 ‘조선’이라는 명칭에 ‘古’자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째거나, 김부식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에도 왕조 또는 당시의 국가형태로 볼 수 있는 ‘옛 조선’의 자료는 지나(중국)의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정임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옛 조선의 주체가 당시의 고려가 계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조선’의 명칭이 유래를 ‘국가명’으로만 고집하다 보면 지난 몇백년동안의 논쟁과 같이 억측만 난무할 뿐이다.
– (조용한)아침의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말은 한낮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이야기다. 이 말은 근세의 중화주의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 아사달 역시 억측에 불과하다
– 주신-숙신, 조선 상당히 일리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용어가 바로 조선으로 변천한 것이라는 것은 무리이다.

3) 확실한 건
가) ‘조선’이라는 용어가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BC 5C 전에 존재했다는 것
나) 지나(중국) 동북쪽 한반도 북쪽에 존재한 명칭이라는 것
다) 최소한 지역, 종족(민족)을 대표하는 명칭이라는 것


이상의 확실한 근거를 놓고 보면, 만주강역(지역)에 수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져가거나 변형되어온 여진,숙신,읍루,부여,고구려,구려,거란,연,산융 등등의 종족이름이면서도 지역이름과도 같은 성격을 가진 명칭들과 같이 ‘조선’ 또한 어원의 출발은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단군, 위만, 기자 등의 조선지역에 주류세력으로 누대에 걸쳐 거쳐간 세력 또한 ‘조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져 그 특정세력과 특정거점이 이동과 변천을 거듭하지만 이를 계승하였다고 여겨지는 각 시대마다 당시의 조건하여 조선의 후계라고 믿었을 것이며 고려를 이은 태조 이성계 또한 이와 같은 의식이라 본다.

다시 언어의 근원을 정리하자며
‘조선’이라는 용어는 현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존재했던 종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나라이름으로 확장된 용어이며, 뜻이 되는 어원은 고대어를 돌이켜 보기는 어려우나, 일설에 의한 ‘주신(신으로부터 부여받은)->쥬시엔->조선’과 도 같이 어느 종족이든 자신의 종족의 명칭을 말할 때는 당시의 언어로서 최고의 성스러움이나 권한,존중을 나타내듯이(보기; 이스라엘(신의나라) 중국(중심의 나라), 일본(태양의 나라) 등) 신과 결부된 최상의 뜻을 가진 언어로 말하듯이 ‘조선’ 또한 그러한 듯을 가졌다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뜻에 관련한 어원으로
신지(神誌), 식신(息愼), 숙신(肅愼), 진한(辰汗),여진(女眞),주인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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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朝鮮의 朝는 ‘돌(鳥)’을 음차함인가? | 박구위瓠公

朝(조)는 ‘돌’의 음차일까?

朝鮮(조선)은 무슨뜻인가? 그 어느 누구도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대개 朝鮮(조선)이란 첫도읍의 이름인 ‘아사달’을 따라 아침을 뜻하는 朝를 썼다고 하지만, 이런 해석은 고대에 우리나라 지방명을 漢語(한어)로 번역하여 썼다고 결론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경덕왕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지방명은 대개 음차이며 朝鮮(조선)이란 이름이 尙書(상서)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는 漢譯(한역)이 아니라 음차이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朝鮮이란 우리고유어를 음차한 글자로서 쉽게 한자어로 쓰면 鳥白國(조백국)의 뜻이며 혹 鳳凰白國(봉황백국)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 이유를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鮮자로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鮮(선)의 뜻

어느시댄가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우고 자신에게 신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雄(웅)으로 신격화하고 어머니를 곰이라 하여 그 시대의 동물숭배자들과 융화를 꾀하였던 땅이 곧 백산(白山)의 영역안에 있었다. 고대국가는 보통 그 첫도읍의 이름을 국가명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단군왕검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세운 국가의 도읍이 바로 白山(백산)의 줄기에 있었으며 白이란 뜻의 관형어가 우리말로 ‘센’이므로 국가명에 鮮을 썼던것이며 이는 ‘센’으로 읽어야만 한다. 오히려 朝鮮이란 국명의 주요점은 朝에 있는 것이 아니라 鮮에 있다. 그 증거가 대동운부군옥에 있는데 朝鮮(조선)과 震檀(진단)은 같은 이름이라고 하였다.
震檀(진단)의 震은 ‘센’을 음차한 글자이고 그 뜻은 곧 白이며, 檀은 박달나무와 아무런 연관이 없고 더군다나 ‘밝음’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저 오늘날 ‘고을’, ‘마을’, ‘실’과 같은 지명어미이다. 삼국사기에는 呑(탄)을 많이 썼고 중국사서에서는 屯이라 하였던 말이다. 따라서 震檀「센단이란 그저 白國(백국)의 뜻이다.
따라서 朝鮮(조선)에서 중요한 글자는 鮮으로 ‘센’으로 읽으며 白의 뜻이고 震檀(진단)에서 중요한 글자는 震으로 ‘센’으로 읽으며 白의 뜻이다.

朝(조)는 ‘돌’의 음차일까?

이유는 알수없지만 우리조상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던 ‘새’를 숭상하였다. 고조선 유민이 세웠다던 辰韓(진한)으로부터 출발한 신라는 ‘斯盧(사로)’라고 하였던 국가인데 ‘盧’는 지명어미 ‘나라’의 뜻이며 ‘斯’는 우리말 ‘새’를 음차하였음이 분명하다. 역시 新羅(신라)도 삼국사기에는 새롭게 번창하느니 뭐니 견강부회하여 써놓았지만 이 역시도 ‘새라’ 즉 ‘새의 나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새’를 뜻하던 다른 말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돌’이다.[1] 이 말은 ‘ㄱ’곡용을 하던 체언으로서 그 흔적이 ‘닭’에 남아 있음은 ‘돌’에 주격조사 ‘이’를 붙이면 ‘돌기’가 되는데 오늘날 문법에 곡용을 허용하지 않고 체언뒤에 받쳐쓰기때문에 ‘닭’으로 변하였음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새’를 빗대어 삼국사기에 ‘鷄林(계림)’이라 하였었다. 아직도 ‘돌’이 붙은 새이름이 몇개 보이는데 ‘까투리’와 ‘팥닭’ 즉 뜸부기이다. ‘수리’란 맹금류를 칭하는 이름이었던 것처럼 ‘도리’를 접미어로 붙인 새들은 머리에 볏이 있거나 깃이 화려하다고 볼수있을까? 닭은 볏이 뚜렷하고 까투리는 암꿩으로 그 깃이 화려하여 박제를 많이 하였던 새이고 팥닭은 화려하거나 크지는 않지만 머리에 볏같은 깃이 조그맣게 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의 머리에 난 ‘볏’을 빗대에 ‘벼슬’한다고 하였던 것이며 우리나라의 상징은 예로부터 봉황이었다.
따라서 원래국호 ‘센「白‘을 鮮의 음차하고 그 앞에 국가의 상징이었던 ‘볏달린 새’를 뜻하던 ‘돌’을 그 앞에 붙여 ‘돌센’이라고 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朝의 음은 고대에 ‘조’가 아니라 ‘됴’이었을 것이다. 朝는 倝와 舟가 합쳐진 글자인데 舟의 小篆(소전)이 月의 楷体와 비슷하였기에 朝의 형태를 띄었지만 음은 舟를 따라야 한다. 舟의 음이 ‘듀’이거나 朝의 음이 ‘됴’라 하더라도 이는 ‘돌’과는 좀 거리가 먼 글자였는데 왜 굳이 朝를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혹 朝의 옛음가에 ㄹ받침이 들어갔던가?
여기서 우리는 주변국가의 이름에서 朝鮮의 음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金(금)의 원래 국호는 朱申(주신)이며 또한 朱里眞(주리진)이라고도 한다. 里로 표기되는 발음은 중국인들이 자기네들 글자로 표기할때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朝鮮이란 표기도 그 중간에 里와 같은 ㄹ발음이 빠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다면 朝鮮도 ‘됴센’도 ‘됼센’ 또는 됴리센’으로 읽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며 이는 곧 鳥白의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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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ww.sejong.or.kr의 ‘닭’에 대한 풀이 참조




2005-05-10

장대

치켜세운 장대 끝을 하늘에 두고

바람에 씻기우고 싶다

비닐덮어 띄우는 거름 속 같은 시간의 흐름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시간임이 진작이였지

이백년이언들 이틀에 앞선 때와 다르지 않는 건
이십년을 더한 세월일지라도 이틀 지남과 다르지 않으리

더하지 말고 버려라
내 인연의 끈을 갈기갈기 장대 끝에 두어
가는 곳 없는 바람에 맡기거라

썩을대로 썩어 뜬내조차 삭아버린
거름은 다시 흙이되고 나 마저 잊혀진 세월에
기억할 시공간은 장대 끝에 머무는 어지러움인가 보다



반구대


 

2005-05-07

오월의 신부

 산을 넘어서는 바람은 내내 운다

떠날 줄 알은 만남이지만
떠나는 기억속에 차마 부르지 못한 이름 있기에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면 아니 흐를 눈물일진대
후회하는 것이라면 아니 흘릴 눈물일진대
오월의 보리밭 위 하늘은 서럽도록 푸르구나

강을 거스르는 바람은 울지 않는다
사공이 띄운 배에 실린 몸이기에
불러도 돌아설 수 없지만 건너서도 돌아가지 않으리

약속할 수 없는 시간의 미련은 강물에 던지우고
맹세한 사람이여! 그 이름에 면사포 씌우고
오월의 신부는 입술을 깨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