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01

십이월을 여는 아침

십이월을 여는 아침
온도 5도 습도 78% 일강수량 20mm
비는 산끝자락에 하이얀 눈발로 묻어나고
젖은 땅거죽의 고요함은 무거워서 따습한 솜이불같아
잠시만 잠시만 저무는 세월은 붙든다.


2011-11-04

남겨진 가을

붉은 빛 따라 올라 허리에 감도니

님 그림자 천년 전부터 낮 익더라

푸른 빛 금오산정 귓볼을 스치니
뒷바라지 쪽문 옛 느낌 함께이라

구름에 하얀 반쪽 들락이는 달빛
가리어 질지언정 사라지지 않으며

마주하는 소리에 따스한 내음
물결 바람에 씻긴 줄로 알았는데

늦가을 아침 부드러운 바람
꿈결인듯 남겨져 있을 줄이야



2011-10-29

시간속으로

어느 때에 느끼랴

어느 곳에 머물려냐

길은 길에 이어 가고
곱게 물든 날리는 자리

돌아갈 때를 생각하고
머무는 곳은 알지 못하니
무엇으로 이제를 붙잡으리

손놓아도 몇달을 남었던 추억은
입을 떼어도 금새 흔적없어
세월이 바랜 것인가
욕심이 지나친 것인가


2011-10-24

가을_2011

 더 없는 멈춤으로

이대로라도 버틴다

약간 시린 바람에
피멍 살갖 지니리라

때론 시들은 모습일지라도
마르지 않는다


2011-10-10

설레이다

가람에 비켜선 너른 들판 시월 해거름

산 아래 낮은 지붕 위 드리우는 밥짓는 연기
나의 설레임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
길위에 벗어날 수 없기에
벗어나지 않도록 구르는 바퀴
끝없이 구르다가 한 번

한 번은 설레일만도 한데
손끝에 여운조차 없어
더는 더는 담을 수 없는 거가



2011-09-29

가을 비

운동장 빛깔 무겁게 짙어져 있다.

체육관 붉은벽도 더 무거워 보인다.
울타리 넘어 마을은 차가운 안개에 가리웠다.

중간 놀이시간을
질펀한 운동장을 아랑곳 하지 않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시끄러움이 없다면
세상은 이대로 침몰할 것 같은 가을입니다.


2011-09-14

언문(諺文)

 언문(諺文)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은 ‘언문(諺文)’을 “상말을 적는 문자라는 뜻으로, ‘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이라고 풀이하였다. ‘상말’이란 ‘점잖지 못하고 상스러운 말’로서 흔히 ‘쌍말’이라고도 한다. 이 사전의 뜻풀이는 잘못이다. 언문이 상말 글자라니? ‘언문’은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흔하게 쓰던 말이므로 그 사용 실태를 분석하면 너무도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풀이한다는 것은 어떤 의도가 숨어 있지나 않은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기록에 처음 ‘언문’이란 말이 나온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이 글에서 ‘언문’을 ‘상말을 적는 문자’로 바꾸어 보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상말을 적는 문자 28자를 지었는데 …’

 (나) 다음 기록은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 2월 16일 기록이다.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以諺文譯韻會], 동궁과 진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성품이 예단하므로 상을 거듭 내려 주고 이바지를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이 글에서 ‘언문’ 대신 ‘상말을 적는 문자’을 대입하여 보자. ‘…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상말을 적는 문자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고 …’

 (다) 그리고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에 기록된 최만리의 상소에서 ‘언문’이 쓰인 뜻을 짚어보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①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②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

③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1.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서하·여진·일본과 서번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④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라고 하였는데,

이때 ‘언문’은 ①②③④를 정리해 보아도, ‘상말을 적는 문자’가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라) ≪훈민정음≫ 해례본(1446)은 세종이 직접 쓴 서문과 정인지 등이 쓴 해례를 묶은 책으로서 가장 정음을 높이고 자세히 설명한 책인데, 이 책에서 이미 ‘언어(諺語)’라는 말과 ‘언(諺)’이라는 말이 나온다. 합자해를 보면, ‘如諺語爲地 如諺語혀爲舌(우리말 는 한자 地를 표시한 것과 같고 우리말 혀는 舌을 표시한 것과 같다.)’, ‘文與諺雜用則有因字音而補以中終聲者(한자와 우리글을 섞어 쓸 때는 글자 소리에 따라 가운뎃소리나 끝소리를 보충할 때가 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친히 명을 내려 임금께 바치는 서책에 그 임금이 지은 글자를 ‘상말을 적는 문자’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백보 양보하여 조선시대 사람들이 중국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우리 자신을 업신여기는 풍토가 있었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상말을 적는 문자’라고 낮추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말하는 사람은 모두 상말하는 상놈인가 말이다.

 (마) 세종은 28년(1446) 11월 8일에 언문청을 설치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태조실록≫을 내전에 들여오기를 명하고, 드디어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일의 자취를 상고해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시(詩)를 첨입(添入)하게 하니,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실록은 사관이 아니면 볼 수가 없는 것이며, 또 언문청은 얕아서 드러나게 되고 외인의 출입이 잦으니, 신 등은 매우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즉시 명령하여 내전에 들여오게 함을 돌리고, 춘추관 기주관 어효첨과 기사관 양성지에게 초록(抄錄)하여 바치게 하였다.[命太祖實錄入于內, 遂置諺文廳, 考事迹, 添入龍飛詩. 春秋館啓 實錄, 非史官, 不得見.  且諺文廳淺露, 外人出入無常, 臣等深以謂不可. 上卽命還入內, 令春秋館記注官魚孝瞻, 記事官梁誠之抄錄以進.]”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정음청’이 아니라 ‘언문청’이라는 이름의 관청을 만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정음과 언문을 동급의 말로 썼음을 드러내는 일이고, 중국의 사전 풀이와 같이, ‘언(諺)’을 ‘문자로 기록된 말이 아닌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늘 주고받는 말’이라는 1차적인 뜻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기록되지 않은 말, 기록 이전의 말, 사람의 입으로 주고받는 말’을 일러 ‘언(諺)’이라 하고, 이것을 적는 새로운 글자이기 때문에 ‘언문(諺文)’이라 한 것이다. 곧 ‘우리글 훈민정음’을 대신해서 일컫는 말로 쓴 것이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언문이란 말을, ‘상말을 적는 문자, 훈민정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서 사용하였다면, 적어도 위 기록처럼 임금 직속 국가 기관의 이름으로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뜻으로 일부러 사용하는 자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망발이 아니겠는가?

 (바) <중종실록> 중종 6년(1511) 9월 5일 기록에는 ≪설공찬전≫을 금서로 하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헌부가 아뢰기를, ‘채수(蔡壽)가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이 윤회한다는 이야기로, 매우 요망한 것인데 궁궐 안팎이 모두 현혹되어 믿고서, 한문으로 옮기거나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헌부에서 마땅히 거두어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 그러나 법을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憲府啓 ‘蔡壽作薛公瓚傳, 其事皆輪回, 禍福之說, 甚爲妖妄. 中外惑信, 或飜以文字, 或譯以諺語, 傳播惑衆. 府當行移收取, 然恐或有不收入者, 如有後見者治罪.’ 答曰 ‘薛公瓚傳, 事涉妖誕, 禁戢可也. 然不必立法. 餘不允.’]”라고 하였다. 여기서 문자는 한문, 언어는 우리말을 가리키며, ‘역이언어(譯以諺語)’는 ‘우리말로 번역함’을 말하므로 곧 ‘언해’를 뜻한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설공찬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임을 밝히게 된 것이다.

 (사) 이밖에도 ≪훈민정음≫ 언해를 비롯하여 수많은 언해본이 전해지는데, ‘언해(諺解)’라는 말이 처음 쓰여진 것은 ≪소학언해≫(1587)와 ≪논어언해≫(1588~1590) 등 사서 언해(四書諺解)라고 한다. 여기서도 ‘언(諺)’은 ‘우리 말(글)’로 풀어야 옳다. 이와 비슷한 말로, 한문의 원전에 정음으로 달아놓은 구결을 ‘언토(諺吐)’ 또는 ‘언두(諺讀)’라 부르는 일과, 언해를 ‘언역(諺譯)’ 또는 ‘언석(諺釋)’이라고 쓴 것을 볼 때, ‘언(諺)’은 항상 ‘우리 말(글)’이라는 뜻으로 썼던 말임을 알 수 있으니, 조선시대의 ‘우리’는 곧 ‘조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초기 기록에서 보기글을 찾아본 결과, ‘언문’이란 “훈민정음을 ‘우리나라 백성들이 주고받는 말을 적은 문자, 우리 글자’라는 뜻으로 일컬은 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최만리와 같은 유학자들은, 중국과 대조하여 ‘조선 글자 또는 중국이 아닌 변방의 글자’로 여기고 이 말을 썼음도 알 수 있다. 언문과 함께 ‘언어(諺語)’라는 말도 해례본과 실록에 나타나는데, 이 말은 중국에서도 썼던 낱말이다. 큰 뜻은 ‘백성의 말소리’이며,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는 ‘(언문과 짝을 이루어) 우리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언문-우리글, 언어-우리말’ 정도로 풀이하면 잘 들어맞는다. 다음 달에는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져온곳 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http://cafe.naver.com/azazaq 2012.2.22.)

 [ 옮긴 이 생각 ]

언문(諺文)을 상말이라고 하는 건 반드시 천시하는 것은 아니라 본다.

상놈(常놈)이라고 하는 말 또한 ‘보통의 사람’, ‘일반인, ‘백성’을 뜻하나, 관료가 우대받고 서열화 되는 사회에서 자연히 아무것도 없는 최하위 계층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 상대적으로 천하게 여기는 대상에 대하여 ‘상놈’이라고 칭하듯이

“언문”

한자는 상대적으로 어렵고 많은 학습과정을 통하여 배워야 하고, 지식을 독점하는 특정 계층에서만 사용하기에 스스로 고급스럽다 생각했을 것이고,

언문은 ‘보통의 글자’, 보통사람들이 쓰는 글자’ , ‘일반인들이 쓰는 글자로 인식하였기에

문화 사대에 빠진 계층에서는 천시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 관념에서 ‘언문’이라는 말을 요즈음 말로 풀이한다면

‘보통의 글자’, ‘서민의 글자’, 등으로 풀이할 수 있으나

그러한 계급의식에서 바라보는 관념 보다는

‘바탕이 되는 글’, ‘모든사람의 글’ 로 풀이하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진다.

2011-01-31

대숲 바람

퍼득이는 바람이 대숲을 흔든다
입춘이 몇칠 남지않은 마지막 추위라 했던가
마른잔디 마당에 햇살은 시간이 멈춘 그림 같은데
겨울 한낮 적막함과 대숲 스치우는 소리는
아득한 시간을 다시 추스려 묻는다
지난 시간이 아름답더냐고
아니 아름다운 것은 지나간것이라고

2010-12-12

다시

시 십이월의 햇살이 뉘이고
할 말은 없습니다
할 일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스팔트에 무리지어 쓸리는 가랑잎처럼 시절은 다시 쓸려갑니다
어디라고 박힌 건 없습니다
바램이 아니더라도 돌아오는 시절이겠죠
강풍주의보가 내려졌다합니다
쓸려간 가랑잎은 돌아오는 시절엔 없을 겁니다
다시 쳐드는 햇살에는
할 말도 할 일도 겨울하늘처럼 말갛게 씻겨있겠죠

2010-12-10

2010-12-05

마른잎

 쓰레기처럼 바람에 쓸리고

푸르던 때도 곱게 물든 때도
억지 기억 같은 길섶에 마른잎
마주하는 겨울햇살에 공감대는
힘든 시간의 언저리이라
바람에 뱉는 말에는 눈길을 마주할 수 없다
푸르던 때가 있었나
절절한 피멍이라도 들었던 때가 있었나
늘어가는 시간에 말라가는 기억이며
이어가는 시간은 여전한 억지인가

2010-11-18

홍살문 그 모양과 유래에 대한 살핌

 홍살문 그 모양과 유래에 대한 살핌

홍살문, 왕릉 입구의 문, 일본 신사의 입구의 장식문, 이러한 것들을 자세히 보면 어딘가 닮은 점이 있다.

궁전·관아(官衙)·능(陵)·묘(廟)·원(園)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 홍전문(紅箭門)·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한국에는 대체로 ‘홍살문’이라하여 능묘 또는 향교, 열려문 등에 설치된 형태는 조선시대에 와서 정착된 모양새이다.

 ■ 주요 형태

세로로 2.4m~3m간격으로 세운 두 개의 기둥 위에 가로로 두 개의 보를 걸치고 보사이에 창살을 끼운 형태

서원 앞에 세워진 홍살문


종로에 세워졌던 홍살문




홍살문이 집중되어 세워진 시대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지금의 형태로 관아와 능묘 뿐만 아니라, 서원, 마을,개인집에까지 분포될정도로 흔하게 세워졌다.

형태 또한 고려시대에는 창살이 없었다고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창살과 태극문양 등이 추가 되면서 크기 또한 거대한 것도 세워졌다.

  ■ 의미

홍살문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한 곳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설치 장소 또는 설치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대체로 중요한 시설물이 있고 보호해야할 시설물로 신성시 하는 곳에 들어가는 경계지점(출입지점)에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보아서는 적어도 홍살문이 설치된 곳은 경계안에는 중요시설 또는 보호해야할 신성한 시설물이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 유래 및 이웃나라 유물과 친연성

홍살문의 의미가 명확히 전해오지 않는 것 처럼 그 유래도 명확하지 않으며, 비슷한 형태, 비슷한 사례가 곳곳에 있어 짐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 황하문명에서 유래하였다는 가설

전통에 관한 것을 그 유래를 찾을 때 대체로 황하문명(지금의 중국)에서 찾는 경우가 많아, 홍살문 또한 황화문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는 잘못된 짐작이라 여겨진다.
지금의 중국에서 찾을 수 있는 홍살문의 형태는 한국의 것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다만 중요 시설문 입구의 출입문 형태로 두 개의 기둥을 세운 시설을 볼 수 있으나, 그 위에 지붕을 올리거나, 명패(간판)를 부착하기 위한 형태로 홍살문의 원형이거나 변형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황하문면권에서 유래하지 않았고, 오리려 한국의 홍살문이 황하문명권에 일정한 영향을 기쳐 지금의 중국에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출입문 형태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중국에서 유래한 정려(旌閭)문 또는 홍문(紅門)과 서로 섞여져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 일본의 도리이

일본의 신사 앞에 세워진 도리이(鳥居)는 우리나라 홍살문의 형태와 크기는 아주 비슷하며, 도리이가 설치된 장소는 신사 또는 궁의 입구로써 신성한 장소의 입구라는 점도 홍상문의 의미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다만 형태면에서 일본의 도리이는 창살이 없으며, 두 개의 보를 하나는 기중을 가로 지르고 하나는 기둥위에 얹어두는 형태이다.



일본의 신사에서 볼 수 있는 도리이의 모양은 한국의 홍살문에서 유래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문화의 흐름이 어느 일방일 수 없기 때문에 종교(신앙)의 의미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면 한국에서 전달된 문화의 일부가 변화되어 종교시설물이 있는 곳에 홍살문 형태인 도라이가 설치 되지 않았나 짐작된다.

 △ 솟대

고대 소도(蘇塗)에 세워둔 것으로 알려진 솟대의 의미는 홍살문과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다.  솟대는 한국의 남부지역에 집중하여 분포하였고 북쪽으로 갈수록 드물 게 보여진다.

솟대와 홍살문은 형태면에서 사뭇 다르나 기둥을 세우는 것과 신성한 곳의 표식으로 삼는 점은 같다고 볼 수 있기에 홍살문과 어느 정도 문화섞임이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 사찰의 일주문

한국의 사찰 입구에 위치한 일주문이 홍살문 형태와 비슷한 면은 두 개의 기둥만으로 만들어져 있어 지붕이 없다면, 그 위치와 의미가 홍살문과 비슷하다. 같은 사찰의 일주문이라도 중국의 사찰의 경우 삼문(三門)형태가 많으므로 한국의 사찰의 일주문은 어느 정도 홍살문 형태 요소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 고아시아 문화에서 흔적

아무르강 유역에 거주하는 어룬춘족[卾倫春族(악륜춘족)]이 사냥을 하여 멧돼지를 도살하고 난뒤 의식을 올리는 과정에 사용하는 것으로 오른쪽 그림과 같은 도구가 보인다. 도구의 형태는 반원형태의 활모양이며 가로 막대에 나무문양을 한 창살 다섯개가 붙여둔 형태이며 자작나무 높은 가지에 걸어둔다.
홍살문과의 비슷한 면은 기둥이 없다는 것이나, 이는 휴대에 편하도록 기둥을 색량하는 대신 자작나무 높은 곳에 걸어둔 모양은 창살모양 나무 문양이 있어 거의 홍살문을 그림을 쉽게 끄집어 낼 수 정도다.
또한 주술과 종교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 홍살문의 의미와 같다 하겠다


 

 ■ 정리

 △ 홍살문의 성격

홍살문의 유래는 흔히 알고 있는 유교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명백히 아니며, 오히려 후대의 유교문화와 결합되어 홍문,홍살문,정려문 등의 형태로 다시 만들어진 경우라 보인다.

홍살문은 시대별 지역(나라)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그 쓰임새와 의미 또한 조금씩은 다르나, 다음에 열거한 요소가 같다.

1. 두 개의 기둥을 가지고 폐쇄형으로 세워졌다는 것

2. 출입의 경계를 짓는 문(問)의 구실을 한다는 것

3. 안쪽과 바깥쪽을 경계 짓고 경계안은 신성한 지역이라는 걸 표시한다는 것

4. 종교,신앙,주술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

위 사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살문의 형태의 분포는 동북아시아에 분포되어 있는 문화현상으로 국가가 성립되기 전부터 전해오는 문화지표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동북아시아의 고대 종교/신앙으로 불리우는 샤먼과도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  과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온 홍살문은 동북아시아의 또하나의 문화지표로서 아직 많은 부분을 다시 살펴봐야 할 과제이며, 이 과제를 통해서 한국의 고유문화와 동북아시아의 고대문화를 보다 더 자세히 알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