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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1

운강 이강년선생 유허지 답사


운강 이강년선생 유허지 답사

 날짜 : 2008.06.28.09:00~19:00
참석 : 회원 4명(정연○,리세○,노정○,정승○)

대한제국 시기부터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항일독립 운동한 선조들의 유허지를 답사하는 것은 친일의 아픈 상처의 역사의 반면에 민족 자존심을 드높였던 항일 애국지사들을 찾아 기리는 행위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민족과 역사의 정체성을 다시금 새기는 계기가 되고, 역사를  이어갈 자손들에게 민족과 역사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산교육을 위한 방편을 모색하고자, 올해는 사전 답사형식으로 회원들 몇 명으로도 우선 답사를 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2009년도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는 테마형 답사를 해보려는 계획이다.

지난 4월에 왕산 허위선생의 묘소와 나신 곳을 답사하고 난 뒤 짝수 달마다 항일 의병활동으로 영남지방에 익히 알려진 인물을 더듬어 보는 계획을 세우고, 이번에 문경 가은에서 나셔서 대한제국 시기에 소백산맥 일대에서 의병활동으로 그 공이 높은 운강 이강녕선생의 나신 곳과 기념관 그리고 묘소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때마다 시간을 낼 수 없는 회원님들의 바쁜 생계가 우선인지라 모일 수 있는 분들만이라도 모여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6월 28일 이날 함께한 분들은 나를 포함하여 4명으로 출발하였다.

문경 가은까지는 경북지역이지만 그리 녹녹한 거리가 아니었다. 고속도로를 통하여 문경새재 나들목을 빠져나와 가은읍 쪽으로 향했다. 가은읍에서 우선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이 있는 완장리를 찾아가는데, 주변에 석탄박물과 연개소문 찰영장 등의 관광안내를 위한 이정표는 곳곳에 보였지만, 어디에도 운강 선생의 기념관을 알려주는 이정표는 없었다

가는 길은 용추계곡방향이라는 걸 지도로 확인되어 용추계곡 가는 길로 중간 중간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도착하니, 출발할 때 조금씩 뿌리던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하였고 본관 전시관에 왼편 의충사 사당에 먼저 참배를 하고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전시물은 운강선생의 개인 유품 몇 점과 대부분 항일독립운동하였던 분들이 풍찬노숙의 삶이므로 전해오는 관련 유품이 그리 많지 않았고 관련 모형전시물과 설명 자료가 전부였지만, 이나마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 다행으로 여겨졌다. 전시관 전체가 지은 지 몇 해 되지 않아 깨끗하였으나, 올 때부터 이정표 하나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로 그리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임이 역력하였다.

 전시관을 들러보면서 관리사무소에는 사람이 없고 때마침 지역 언론인 ‘내사랑 문경 인터넷신문’의 취재가 있어 그 사람들과 몇 마디 화제로 삼은 것은 전시관의 소화기가 제조일이 2001년도만 찍혀있고 유효기간이 5년인데 그 중간에 단 한번도 충약한 기록이 없어 충약문제와 전시관 앞에 지역민들의 모금으로 세웠다는 비석과 함께 있는 깃발계양대에 태극기와 문경시 깃발 이외에 민간단체인 새마을 깃발이 나란히 걸려 있길래 뭔가 어울지 않지 않는가 하고 이를 언론의 논제를 삼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거론하니,

충약하지 않은 소화기

 

새마을깃발+태극기+문경시깃발

 



의외로 문경인터넷신문 관계자는 마치 자신들이 관리의 주체가 되고 자신들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인 양 즉시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새마을 깃발은 마을 청년회에서 자발적으로 걸어 둔 것이라고 해명(?)하였고, 소화기 충약도 사용에 지장이 없다고 변명(?)을 하여, 묻는 내가 어색한 처지가 되어 그냥 그러네요 하고 돌아서서 기념관에서 한 오백여미터 위쪽에 있는 운강선생의 나신곳을 살펴보러 출발했다. 안내현판에 생가지터로 되어 있고 안내 비석에는 ‘나신곳’으로 표기되어 있어, 우리의 문화적 표현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익숙한 ‘생가’, ‘생가지’ 이러한 표기보다는 ‘나신곳’,‘나신집‘ 이 표현이 입에 익지 않아도 앞으로 자주 써야할 것 같다. 운강선생의 나신 집은 자물통으로 굳게 닫혀 있어 주차장에 딸린 매점에 부탁하니 관리하시는 분에게 연락하여 금방 달려와 열어주어 볼 수 있었으며, 나신집 또한 기념과과 마찬가지로 복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갈한 상태였다.

태어나신 집(안채)
태어나신집(별채)

시간이 오후 한시 무렵 되었지만 우리 일행은 묘소 참배를 하고 곧바로 대구로 향하면 칠곡 왜관 부근에 있는 이조명가를 운영하시는 회원님의 집을 방문할 것을 계획했기 때문에 점심을 조금 늦추어 이조명가 회원님 집에 가서 할 것을 계획하고 운강 이강년 선생의 묘소를 찾아 길을 재촉했다.

묘소는 나신 곳과는 다른 행정구역인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에 있다는 정보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묘소 위치는 기념관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얻을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가은읍으로 다시 나와 농암면을 거쳐 상주시 화북면으로 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 한참 헤매다가 화북면에 접어 들어 입석리를 찾았으나, 기념과 조차 이정표 없는 마당에 묘소의 안내판은 있을 리 만무하여, 입석리에 위치에 백악산흥부네 식당에 들러 물으니 잘 알지 못하였지만 친절하게도 입석1리 리장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어 위치를 물을 수 있었다. 리장이 알려 준 대로 늘고개를 넘기전 오른쪽으로 나 있는 산길을 접어들었는데 막힌 도로로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나와 백두대간이라는 커다란 돌비석이 있는 고갯길을 넘어 위치한 마을을 살펴 보아도 리장이 알려준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늘고개 백두대간 표석]

[청화산휴게소]


[백악산흥부네식당]

[진입로 공사현장]


다시 고개를 넘어가서 자세히 보니 늘고갯길 일대에 많은 불루베리 농장이 있는 가공공장 옆으로 비포장 산길이 있어 들어서니 배수로공사와 더불어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진행 중인 길이여서 리장에세 들은 바와 같아 길의 끝까지 가니, 농가 한 채가 있고 길은 끊어져 있었다. 오후들어 빗줄기는 더 거세게 내리고 비포장 도로 바닥은 진흙구덩이로 답사의 길은 탐사의 길이 되고 있었다.

길은 보이질 않고 잘못 들어선 것일까 하여 다시 돌아 나와 고갯길 마루에 있는 불루베리 판매장과 휴게식당을 겸한 청화산 농원에 들어가 식당주인에게 길을 물으니 조금전 들어선 길은 맞는데, 공사중이라 길을 끊어 놓았다고 했다. 끝어진 길을 건너 올라가면 자리 좋은 곳에 운강이강년선생의 묘소가 있다하여 다시 진흙길을 들어가서 차를 세워두고 배수로공사 때문에 끊어 놓은 산길을 우산을 받쳐 들고 올라서니 굴삭기 장비가 올라간 흔적으로 길이 이어져 있어 따라올라 능선까지 올라갔지만 이름모를 묘지만 몇기 보일뿐 찾을 수 없었다. 진흙과 비에 젖은 풀섶에 신발과 옷가지는 다 젖었고, 운강이강년선생의 묘소는 쉽게 찾을 수 가 없었다. 능선 주변을 돌아보아도 숲이 우거진 곳에서 쉽게 눈에 뜨이질 않아 아마도 길을 잘못 들었을 것 같아 다시 내려오면서 주위를 찬찬히 훑어보니 배수로 공사로 끊어놓은 지점에서 바로 왼쪽 수풀 속에 통나무로 계단을 한 흔적이 있어 그 길을 따라 삼십여 미터 올라가니 그렇게도 찾던 ‘도창의대장운강이선생지묘(都倡義大將雲岡李先生之墓)’’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무릅쓰고 준비해간 법주와 오징어를 올려두고 참배하였다. 묘소관리는 1987년부터 화북면명륜회에서 자원봉사로 관리되어 오고 있다고 인터넷(내사랑문경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운강이강년 생묘소의 정화사업추진위워회가 구성되어 묘소를 성역화하는 공사가 진행중에 있어 우리가 찾아 올라갈 때 배수로와 도로확장공사의 진흙길이였던 것이다. 아마도 내년에 다시 찾아 올 때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참배를 마치고 서둘러 산을 내려와도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어, 출발할 때 가기로 약속할 땐 오후 2시에서 3시이면 갈 수 있다고 여겼던 칠곡군의 이조명가에 이르기는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다. 더군다나 일행 중에 저녁시간에 생업과 관련하여 중요한 약속이 있는 터라, 더더욱 여유가 없게 되어 가기로 했던 칠곡군 회원님 집엔 취소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 급하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편하게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식사를 때우고 서둘러 대구로 돌아와도 이미 저녁 7시가 되어가고 있었다.운강이강년선생의 기념사업은 그나마 지방자치단체의 지역관광사업과 관련하여 최근년도에 들어 새로 조성되어 관리되고 있었지만, 석탄박물관과 연개소문 찰영장 이라든지 용추계곡 등의 관광자원에 비하면 나신곳과 기념관이 가은읍에서도 한참 들어간 골짜기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이정표 하나 제대로 없고 더군다나 묘소는 그 곳에 살면서 관심 있는 사람 몇 명만 알고 있을 정도로 우리의 관심 밖에 존재하고 있음을 새삼 느낄 때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운강 이강년선생 묘소]


[참배를 위한 준비]

[참배_(카메라 타이머작동)]


[ 묘소에서 바라본 청화산 전경]


2008.07.01.한들 쓰다


 

>> 운강 이강녕선생 기념관에 관련한 민원 제기 및 답변 내용(2008.07.01)

 

 

[운강 이강년 의병장 유허지 답사 후

문경시장에게 바란다’민원게시판에 올린 내용입니다
—————————————————————————-
지난 6월 28일 비오는 가운데도 불구하고 문경시 가은에 있는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조성된지 몇해 되지 않은 기념관이라서 그런지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어 보기에 좋았습니다.
기념관에 들리어어 운강 이강년선생의 영전에 참배하고 , 묘소는 상주시 화북면에 있어 비오는 산중에서 선생의 묘소를 물어물어 찾아 보고난 뒤
운강 기념사업을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한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이렇게 글을 남김니다.
먼저 기념관을 들러 볼때
1. 기념관을 축조한 나무 기둥의 많은 부분에 좀이 먹어 들어가고 있어 지금 바로 방제작업을 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막대한 비용이 들것으로 보여지며,
2. 유효기간이 5년인 소화기의 제조년월일 2001년도로 되어 있고 단 한번도 충약된 흔적이 없어 방화관리에 조금 소홀하여 보였으며,
3. 정문 왼쪽편에 국기 계양대에 나란히 걸려있는 민간단체의 깃발인 새마을기는 정녕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하고는 무슨 의미가 있는 지 알길이 없더군요~
그리고 또 한가지
기념관이 가은에 있다는 것만 알고 가은읍까지 찾아 왔으나, 석탁박물관과 연개소문 찰영장 이정표는 한쪽 눈을 감고 찾을 수 정도로 자세한 이정표가 되어 있는데
4. 어찌하여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 가는 길은 이정표 하나 없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덧붙여 기념관에서 운강 이강년 선생의 묘소에 대한 안내지도를 제공되었더라면 그날 비오는 가운데 산길을 헤매이지은 않았을 걸 하고 아쉬워해 해 봅니다.
아무쪼록 기념관 관리에 애쓰시는데 이렇게 불편한 글을 올리게 되어 송구스러운 마음 금치 못하지만 운강 이강연선생의 뜻을 기리는 한사람으로서 느끼는 마음을 여쭈어 봅니다.
이에 대하여 문경시의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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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문경시청에 올리고 난뒤 몇 칠후 문경석탄박물관 소속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석탄박물관에서 전화 올일 없다하니,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도 석탄박물관에서 관리한다고
하더군요, 전화로 몇가지 의논하고, 다음 예산편성시 근거가 되도록 글을 올렸다 설명하고
답글을 편하게 달아 달라고 했고, 답글은 몇칠 후 아래와 같이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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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답변]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을 다녀와서

○ 우리시를 방문해 주시고,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선생님께서 찾아주신 운강 이강년 기념관은 지난 2002년 4월에 개관하여 지금까지 지역민과 외부  관광객, 청소년 등 수많은 관람객이 다녀간 호국의 성지입니다. 문경시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운강  이강년 선생을 현양하기 위하여 선생의 생가지를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하고, 생가터에 3동의 생가를 복원 하였습니다. 이렇게 진행된 현양 사업은 지역민과 보훈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운강 이강년 기념관을 건립하게 된 것입니다.
정 선생님께서 방문하신 후 지적하신 문제점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기념관을 축조한 나무 기둥의 많은 부분에 좀이 먹어 들어가고 있어 지금 바로 방제작업을 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막대한 비용이 들것으로 보여지며
☞  나무기둥에 좀이 생기는 원인은 “황슭감탕벌”이라는 곤충이 드나들면서 생긴 공간으로서, 선생님의  의견처럼 방제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 보수하는데 큰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빠른시일내에 전문가의 현장조사결과를 토대로 방제작업을 실시한 후 관리에 철저를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2. 유효기간이 5년인 소화기의 제조년월일 2001년도로 되어 있고 단 한번도 충약된 흔적이 없어 방화관리에 조금 소홀하여 보였으며,
☞  소화기 관리는 문경시와 문경소방서에서 지속적으로 매년 2~3회 주기적인 정기점검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정기 및 수시점검을 통해 방화관리에 철저를 기하겠습니다.

3. 정문 왼쪽편에 국기 게양대에 나란히 걸려있는 민간단체의 깃발인 새마을기는 정녕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하고는 무슨 의미가 있는 지 알길이 없더군요~
☞  기념관 앞에 설치된 국기게양대는 운강선생 휘하 부대원들의 후손과, 지역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합하여 설치하였으며,  당시 국기게양대 건립과 관련한 기념비가 기념관 맞은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운강 이강년 선생의 휘하 부대원들 후손의 뜻과 지역민의 뜻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 기념관이 가은에 있다는 것만 알고 가은읍까지 찾아 왔으나, 석탄박물관과 연개소문 찰영장 이정표는 한쪽 눈을 감고 찾을 수 정도로 자세한 이정표가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 가는 길은 이정표 하나 없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덧붙여 기념관에서 운강 이강년 선생의 묘소에 대한 안내지도를 제공되었더라면 그날 비오는 가운데 산길을 헤메이지는 않았을 걸 하고 아쉬워해 해 봅니다.
☞  운강 이강년 선생의 기념관을 찾아오시는데 이정표가 없어 불편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이정표를 설치하기 위하여 현재 설치장소 조사 등 추진중에 있으며  또한, 운강  이강년 선생의 묘소까지 찾아가는 길 안내는 기념관 입구에 위치도와 사진을 게재하여 관람객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문경관광에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리며,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내용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gbmg.go.kr/open_content/mayor/wish/index.asp?command=view&page=1&idx=738&cate=&query=

 

 





















2008-04-09

역사는 진실의 붓 끝으로 기록된다

“역사는 진실의 붓 끝으로 기록된다”
[평화뉴스] 인혁당 조작사건 4.9통일열사 33주기 추모제
2008년 04월 09일 (수) 09:28:21  남승렬·평화뉴스 기자
1975년 4월9일 대법원 형 확정 18시간만에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사법살인’이라고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이 올해로 33주기를 맞았다. 가칭’사단법인 4·9인혁재단 준비위원회’, ‘경북대학교 여정남공원 건립추진위원회’는 6일 오후 경북대학교 대강당 앞에서 ‘4·9통일열사 33주기 추모 및 정신 계승대회’를 열었다.

  ▲ 지난 6일 경북대에서 열린 4.9통일열사 추모제에서 인혁당 사건 희생자 고 도예종씨의 부인인 신동숙씨가 헌화에 앞서 기도하고 있다. ⓒ평화뉴스

이날 행사에는 고 서도원씨 부인 배수자씨, 고 여정남씨 조카 여상화씨, 고 도예종씨 부인 신동숙씨, 고 이재형씨 부인 김광자씨를 비롯한 인혁당 사건 희생자 유가족과 관련자, 인혁재단 준비위, 경북대 여정남공원 건립추진위를 비롯, 대구경북지역 진보진영 인사 200여명이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대회사에서 류근삼 ‘4·9인혁재단 준비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은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1975년 4월 8일 박정희 독재정권의 사법살인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사회는 더 많은 변화와 성취를 했을 것”이라며 “우리는 인혁당 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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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여정남씨의 조카 상화씨. ⓒ평화뉴스

“오늘 우리는 어린 상주처럼 엎디어 다시 웁니다.
그 이름 앞에 들씌워진 천만근 납덩이,
억울과 원한 사무친 죄 없는 죄를 이제야 풀어내고
아무 죄 없음의 희디 흰 국화 한 송이씩을 바치며
우리는 기막히고 기막혀 목 놓아 다시 웁니다.”
김윤곤 시인의 이 추모시가 낭송되자 유가족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경북대 여정남공원 건립추진위원회’ 상임대표를 맞고 있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이현세씨는 “어제 서도원 열사 묘역, 전재권 선생님 묘역을 비롯한 희생자 4분의 묘역을 돌아봤는데 느낀 게 많았다”면서 “그 분들의 정신을 바르게 계승하기 위해서는 흩어져 있는 희생자 분들의 묘역을 한 자리에 모으는 사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영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은 “그 분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소중하게 지키려 했던 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리고 그 뜻을 기리는 일은 우리의 몫”이라면서 “희생자 분들이 평소에 지니고 계셨던 생각과 생전 활동을 알려 나가는 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2월26일 모교인 경북대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은 인혁당 희생자 여정남씨의 조카 여상화(49)씨는 “정의의 역사는 강자의 붓 끝으로 기록되는 게 아니라 진실의 붓 끝으로 기록된다”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구성,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한 뒤, 이듬해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인 4월9일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된 사건이다. 이를 두고 국내외 법조계에서는 이를 ‘사법사상 암흑의 날’, ‘사법살인’으로 부르고 있다.

▲ 1975년 4월9일 사형 선고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희생자들. ⓒ평화뉴스

특히 이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8명 가운데 도예종·서도원·송상진(영남대), 여정남(경북대)씨를 비롯한 4명이 대구경북 출신이다. 이 사건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직권조사를 통해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증거조작, 공판조서 허위 작성, 진술조서 변조, 위법한 재판 등에 의해 조작됐다”고 밝힌데 이어, 2005년 12월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도 “수사지침에 따라 고문과 가혹행위가 자행됐다”며 ‘사건 조작’을 인정했다.이어 서울중앙지법이 2005년 12월27일 ‘재심 개시’를 결정한 뒤 지난해 1월23일 서울중앙지법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무죄’가 확정됐다.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32년 만이다.

그리고 지난해 8월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인혁당 유족을 비롯해 4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가 희생자별로 20~30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한편, 경북대는 여정남씨를 비롯해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모교 출신 3명에 대한 추모 조형물과 추모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인 이현세 경북대 여정남공원 건립추진위원회 상임대표를 비롯한 경북대 출신 사회운동가 35명은 지난 1월12일 경북대학교 인민혁명당사건 열사 추모공원 건립추진위원회를 꾸렸다. 오택진 여정남공원 건립추진위 사무국장은 “추모제에 맞춰 오늘(4월6일) 기공식을 하려 했으나 학교측과 장소와 시기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다른 의견이 나와 그러지 못했다”면서 “그러나 늦어도 내년쯤에는 추모공원이 완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숨진 경북대 출신은 3명으로, 여정남씨는 당시 사형으로 숨졌고, 이재문씨는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1981년 옥사했다. 이재형씨는 이 사건으로 20년형을 선고받고 8년을 복역한 뒤 1982년 출소해 2004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4·9통일열사 33주기 추모 및 정신 계승대회가 지난 6일 유가족을 비롯한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대학교에서 열렸다. ⓒ평화뉴스

이와 함께 (가칭)사단법인 4·9인혁재단도 설립 추진 중에 있다. 여기에는 류근삼 인혁재단 공동준비위원장을 비롯해 대구경북지역 민중.통일.시민.사회 인사 3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오택진 4·9인혁재단 준비위원회 집행위원은 “지난 2월 재단준비위원회가 꾸려졌는데 일단은 열사들의 주 활동무대였던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하되 그 성과는 전국적으로 넓혀나갈 계획”이라면서 “재단이 설립되면 대구경북지역 통일·시민·사회단체 활동가에 대한 지원사업과 교육사업, 학술 연구사업을 비롯해 희생자들의 정신을 잇는 다양한 사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평화뉴스 / 남승렬 기자 pdnamsy@hanmail.net

최초입력 : 2008-04-09 09:28:21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2007-07-01

침략 그리고 영원한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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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비는 비문의 내용처럼 1907년 실습선 조난사건을 기념하여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세워졌으며, 1945년 광복 후 마을 주민들에 의해 쓰러뜨려(워낙 규모가 커 부수지 못함) 놓은 것을 1971년에 재건하고 해마다 일본인들이 방문하여 참배 해오고 있으며, 2001년 해안도로 개설로 현재 위치에 조경시설과 함께 세워졌다.

1971년 비의 재건은 당시 일본 동경수산대학에 문구납품업자인 재일교포 한영춘씨가 문구납품 독점 조건으로 이 비를 재건하였고, 당시 포항시문화재보존위원장인 박일천씨가 비석의 재건을 칭송(讚)하는 글은 작은 비석에 적었는데 그 내용이 비굴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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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비석의 비문을 찬(讚)한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움에 의해서인지 자신의 이름을 파내어 지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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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마을 주민에 의해 철거, 외부 이권으로 재건, 찬(讚)한 사람의 이름이 파내어진 것, 비문 자체에 일본왕의 연호가 메워져 있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으며, 계속해서 존폐 논란이 있으며, 비석을 세운 일본측(동경수산대동창회 낙수회)에서 매년 마을 주민에게 청소비용으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고 유지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하고 있는 등, 단순히 과거를 기록한 돌덩이로 보고 지나치기에는 많은 의혹과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2001년 해안도로개설 과정에서 포항시의 알선으로 그 동안 개인 경작지에 세워져 있던 비석를 옮겨 해안절경에 콘크리트 옹벽과 구조물을 갖추어 새로 세웠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일본제국주의 표석을 다시 이 땅에 세워진 것 같다

침략선이냐 실습선이냐?

 조난을 당한 배는 쾌응환호로 ‘당시 동경수산전문대학 실습선’이며 ‘조난으로 죽은이가 생도였다’,‘고등어 어업조사 또는 수로탐사를 위한 것이다’는 등으로 당시의 사건을 애써 침략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항변하나,

 사건 당시 1907년은 이미 우리의 주권을 유린(을사늑약)한 일본은

우리 강토를 마음대로 드나들고, 우리의 바다는 이미 저들에게 빼앗기고,

저들이 이 땅에 행한 모든 행위는 침탈과 지배의 과정에 지나지 않으므로

실습선이 곧 침략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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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의(定義)는 미래의 문제

– 역사적 사실 논쟁은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한다 –

역사적 사실에 논란이 있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에 삶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라.

독도문제, 임나일본설 …왜 문제가 되고 논란 꺼리가 되어야 하나!

마찬가지로, 

동해절경 호미곶에 세워둔 이 돌기둥의 정의(定義)

훗날 저들이 정복지에 대한 표석이며,

저들의 표현대로 한반도에 진출한 점령비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랴!!!

역사사실의 논란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우리 후손에게 가치혼돈을 안겨 줄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나아가 저들의 과거 침략행위에 당위성을 찾을 자료가 될 것이며

미래에 되풀이 할 침략 근거의 빌미가 될 것이다.

용납할 수 없는 기념

죽은 자에 대한 위로를 위한 단순한 비석이라면 허용 못할 이유가 없다.

죽은 자를 위로하는 어느 비석이 높이 3미터 사각의 육중한 돌기둥으로 세워 마치 이 땅을 지배한 영원한 표석처럼 둔단 말인가?

이 비석은 위령비가 아니다.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기념하는 기념비이다

이러한 비석을 그대로 두는 것은 우리의 치욕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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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광복이 되지 못했다면, 이 비석은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 일본인들이 한반도 진출에 공헌을 한 사건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비석을 둘러싼 지역을 영광스런 행위로 성역화 하여 기념하였을 것이다._100년 전 저들의 영광은 우리의 치욕이다  

저들은 동경수산대학 기록에서도 표현한 바와 같이 오늘에 이국(異國)이 된 한반도에 있는 기념비를 아쉬워하듯, 다시 이 나라 강토에 대한 침략 기회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역사란 정리하는 자의 소유물이다.

이 비석을 미래에도 그대로 둔다는 것은, 과거 100년전의 침략과정에서 일어난 숱한 행위를 개별적인 일로 구분하여 기념할 일이라고 인정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의 후손에게 매우 심각한 가치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겁탈한 자의 행위가 사랑이라고 해석되는 건, 겁탈당한 자가 자발적이라고 말하고, 그걸 사회통념으로 만들면 우리는 또 다시 치욕의 세월에 내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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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쾌응환호조난기념비는 마땅히 철거되어야한다.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는 조난 사건 100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의 후손에게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와 가치혼란을 물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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