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내린다
비는
이미 허옇게 죽은 들뫼에
짙은 빛깔로 스며든다
그저 가벼움만으로
흔들림마저 잦아드는 때결에
기울어진 햇살에 긴 그림자
멍든 잎 애처론 빛깔의 가을이라
가을은 불현듯 오지 않았다
누군가 오랜 기다림으로 열어둔 곳에
찬 이슬에도 더욱 짙은 국화처럼
여름내 쑥대같은 국화가
저토록 노오란 빛일줄이야
국화의 필연이였다
내 무딘 시선에도 꺼리낌없이
홀로 향기 품은 국화
이제에 나 너에게 취한다
더운 기억 지워 없듯
빈하늘 뿌옇게 흩어지는 시간
맹세를 하지 말라 했다
어찌 스스로 만들어 가진 시간 아닌데
마치 제 것인 양 시간을 팔아 맹세하겠는가
지친 더위 아무것도 없듯
허한 공백으로 꾹꾹 눌러 채운 때에
이제는 만나야 한다고 함도 헛된 맹세인가
다시 흩어지고
맹세보다 그냥 이라는 말로
여름은 간다
보도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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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에서는 2009년 7월 4일 포항 대보면 등대박물관에서 2km떨어진 구만리 바닷가에 세워져 있는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가 잘못 인식되고 있음을 개탄하여 이를 바르게 알리고자 안내판을 제작 설치하였다. □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07년 9월에 일본 동경수산대학의 교관 및 생도가 구만리 앞바다에 조난사고로 죽은 사건을 일제강점기인 1926년 기념비를 세웠다가 해방 후 마을주민들에 의해 철거되었던 것을 1971년 재일교포의 주선으로 다시 세워지고 당시 포항문화원장의 찬(讚)하는 비석까지 세웠으나, 찬했던 사람의 이름이 파내어 지우는 등 지금까지 기념비의 성격을 두고 역사해석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 더욱이 올해에 포항시에서는 시승격 60주년 사업일환으로 이 기념비와 관련하여 호미곶 광장 연오랑세오녀 조각상 앞에 시비를 세웠다가 주민들의 반대여론에 의해 철거하는 해프닝을 벌이고도 다시 기념비 자체를 호미곶 광장으로 이전 하려는 계획이 있어 찬반 논란이 되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에 따르면 이 기념비는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어로조사 및 고등어잡이를 위한 학교실습선으로 단순한 조난 사건이 아니라 1907년에 이미 동해 바다를 강탈한 일본이 우리 어민들을 바다에서 완전히 내몰고 이 시기에 이미 포항,구룡포 지역에 일본 거류민이 집단을 이루어 포항지역의 상권을 장악했을 때, 고종황제로부터 밀지를 받고 분연히 일어난 삼난의진 정용기 장군의 포항지역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1907년 7월에서 9월까지 시기와 맞물려 있음에 주목하여, 조난을 당한 실습선은 치안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을 그 시기에 하필 포항으로 실습을 나왔겠느냐 하는 의문과, 설령 군사작전 비밀임무를 띠지 않은 실습선의 조난이다 할지라도 그 시기엔 이미 일본이 우리 동해바다를 빼앗은 상태이기에 빼앗긴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저들의 행위는 침략의 일환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 그리고 더한 문제는 현재도 일본인들은 이 기념비를 기리기 위하여 해마다 방문하는 행위는 과거 점령지에 대한 향수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역사의식이 없는 관료들을 선린우호라는 허울에 부하뇌동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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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뉴스] http://dk.breaknews.com/sub_read.html?uid=16777§ion=sc24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 건립추진 ‘안될말’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선린우호 허울 아래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음” 박영재 기자 경북 포항시의 일본 동경수산대학 교관 및 생도들의 구만리 앞바다 조난사고를 기념하는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 건립 추진은 일제 침략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시책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지부장 리세호)는 30일, “경북 포항시가 조성과 철거를 반복했던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는 단순한 조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이 동해바다 침탈을 위한 기초조사 차원에서 이뤄진 침략행위”라고 밝혔다.
연구소는 “현재 일본인들이 이 조난사고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방문하는 행위가 과거 점령지에 대한 향수인데도 불구하고 일부 역사의식이 없는 관료들이 선린우호라는 허울 아래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연구소는 “남아 있는 기록과 문헌은 없지만 쾌응환호는 병참 역활을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구룡포지역에 일본 거류민이 집단상권을 장악한 점, 치안이 불안한 상태에서 포항으로 실습나와 1주일간 정박한 점 등을 미뤄볼 때 군사적인 비밀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1907년 당시 포항지역을 포함한 경상도 일대 삼남지역에서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 항일 의진활동을 펼친 정용기 장군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점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연구소 관계자들은 7월4일 낮 12시에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에서 전에 쾌응환호 기념비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서 이같은 내용을 담은 안내판을 설치할 예정이다. 이들은 이를 위해 5년전부터 현지답사와 주민 인터뷰를 거쳐 실증적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지난해에는 안내팸플릿을 제작해 대보면 인근 지역에 배포한 바 있다. 정승표 홍보국장은 “쾌응환호 기념비 건립에 일조했던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등 지금까지 기념비 성격을 두고 역사해석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논란은 논란 그대로 유지돼야 하지만 선린우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해석이다”고 말했다. 한편 포항시는 시승격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호미곶 광장 연오랑세오녀 조각상 앞에 쾌응환호 조난 모조비석을 세웠다가 주민들의 반대여론에 부딪치자 철거했으나 기념비 자체를 호미곶 광장으로 이전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으로 찬반논란이 지속되고 있다.쾌응환호 기념비는 1907년9월 일본 동경수산대학의 교관 및 생도들이 구만리 앞바다에서 조난사고로 죽은 사건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다.
기사입력: 2009/06/30 [15:47] 최종편집: ⓒ 브레이크대구경북 |
포항시,‘쾌응환호조난碑’골머리
민족문제硏 “日 침략행위 정당화” 市, 정체성 논란에 재설치 ‘눈치만’ 포항시가 대보면 호미곶 광장에 건립했다가 말썽을 빚고 철거한 ‘쾌응환호조난 기념비’를 다시 설치키로 추진하면서 일부 단체들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자 곤혹스런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 기념비는 대보면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제막식을 치르지도 못하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상태로 재설치 추진을 위해 여론수렴 계획이 알려지자 포항시의 정체성 논란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는 등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는 포항시의 일본 동경수산대학 교관 및 생도들의 구만리 앞바다 조난사고를 기념하는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 건립 추진은 일제 침략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시책이란 주장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지부장 리세호)는 “경북 포항시가 조성과 철거를 반복했던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는 단순한 조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이 동해바다 침탈을 위한 기초조사 차원에서 이뤄진 침략행위”라고 30일 밝혔다. 연구소는 “현재 일본인들이 이 조난사고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방문하는 행위가 과거 점령지에 대한 향수인데도 불구하고 일부 역사의식이 없는 관료들이 선린우호라는 허울 아래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남아 있는 기록과 문헌은 없지만 쾌응환호는 병참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구룡포 지역에 일본 거류민이 집단 상권을 장악한 점, 치안이 불안한 상태에서 포항으로 실습 나와 1주일간 정박한 점 등을 미뤄볼 때 군사적인 비밀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1907년 당시 포항지역을 포함한 경상도 일대 삼남지역에서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 항일 의진 활동을 펼친 정용기 장군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점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연구소 관계자들은 오는 4일 낮 12시에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 쾌응환호 기념비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안내판을 설치할 예정이다. 이들은 이를 위해 5년 전부터 현지답사와 주민 인터뷰를 거쳐 실증적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지난해에는 안내팸플릿을 제작해 대보면 인근 지역에 배포한 바 있다. 정승표 홍보국장은 “쾌응환호 기념비 건립에 일조했던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등 지금까지 기념비 성격을 두고 역사해석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논란은 논란 그대로 유지돼야 하지만 선린우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해석이다”고 말했다. ‘쾌응환호조난 기념비’는 포항시가 지난달 27일 제작했으며 현재 대보면 구만리에 위치해 있는 위령비와 유사한 형태로 한문으로 활자를 새겨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포항시는 대보면 호미곶의 관광객 유치와 볼거리 제공,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호미곶 광장 연오랑세오녀상 앞에 높이 275㎝, 폭 60㎝, 기단 가로세로 3m의 일본 수산강습소 실습선인 ‘쾌응환호조난 기념비’를 시비 850만 원을 들여 조성했다. 하지만 대보면민들은 일본 수산강습소 실습선 명칭을 딴 ‘쾌응환호조난 기념비’는 정서상 맞지가 않다며 강하게 비난하면서 조성된 기념비는 관광객들에게 선도 보이지 못한 채 당초 제작된 위치에서 창고로 옮겨져 보관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포항시 관계자는 “쾌응환호조난 기념비는 창고에 보관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여론 수렴을 거쳐 설치할 계획이다”며 “아직까지 어떠한 방안으로 설치할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했다. 최주호기자 <사진설명>사진은 포항시 대보면 구만리 쾌응환호 조난 100주기를 맞아 조난 기념비를 참배하는 일본인들 모습. 사진 제공=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90630_0002555089 |
포항시, 쾌응환호 기념비 건립 일제 침략행위 정당화 주장 제기돼 기사등록 일시 : [2009-06-30 15:41:44] 【포항=뉴시스】경북 포항시의 일본 동경수산대학 교관 및 생도들의 구만리 앞바다 조난사고를 기념하는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 건립 추진은 일제 침략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시책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지부장 리세호)는 “경북 포항시가 조성과 철거를 반복했던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는 단순한 조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이 동해바다 침탈을 위한 기초조사 차원에서 이뤄진 침략행위”라고 30일 밝혔다. 연구소는 “현재 일본인들이 이 조난사고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방문하는 행위가 과거 점령지에 대한 향수인데도 불구하고 일부 역사의식이 없는 관료들이 선린우호라는 허울 아래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연구소는 “남아 있는 기록과 문헌은 없지만 쾌응환호는 병참 역활을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구룡포지역에 일본 거류민이 집단상권을 장악한 점, 치안이 불안한 상태에서 포항으로 실습나와 1주일간 정박한 점 등을 미뤄볼 때 군사적인 비밀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1907년 당시 포항지역을 포함한 경상도 일대 삼남지역에서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 항일 의진활동을 펼친 정용기 장군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점 등도 이를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연구소 관계자들은 7월4일 낮 12시에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에서 전에 쾌응환호 기념비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서 이같은 내용을 담은 안내판을 설치할 예정이다. 이들은 이를 위해 5년전부터 현지답사와 주민 인터뷰를 거쳐 실증적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지난해에는 안내팸플릿을 제작해 대보면 인근 지역에 배포한 바 있다. 정승표 홍보국장은 “쾌응환호 기념비 건립에 일조했던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등 지금까지 기념비 성격을 두고 역사해석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논란은 논란 그대로 유지돼야 하지만 선린우호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해석이다”고 말했다. 한편 포항시는 시승격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호미곶 광장 연오랑세오녀 조각상 앞에 쾌응환호 조난 모조비석을 세웠다가 주민들의 반대여론에 부딪치자 철거했으나 기념비 자체를 호미곶 광장으로 이전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으로 찬반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쾌응환호 기념비는 1907년9월 일본 동경수산대학의 교관 및 생도들이 구만리 앞바다에서 조난사고로 죽은 사건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다. 강진구기자 dr.kang@newsis.com |
http://www.todaydk.com/board/board.php?board=daegu&config=&command=body&no=17491 [월간 대구경북] |
“아픈 역사 왜곡없이 후세에 전달”
“아픈 역사 왜곡없이 후세에 전달” 민족문화硏, ‘쾌응환호조난 기념비’ 앞 안내판 설치 포항시가 대보면 호미곶 광장 연오랑세오녀상 앞에 ‘쾌응환호조난 기념비’ 재설치를 추진하자 민족문화연구소
대구지부는 지난 4일 낮 12시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에 세워져 있는 ‘쾌응환호조난 기념비’ 앞에서 안내판 설치 행사를 가졌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민족문화연구소 대구지부(지부장 리세호)는 “일제 침략행위의 아픈 역사를 왜곡
없이 후세에 전달할 목적으로 안내판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이날 세워진 안내판에는 ‘점령의 추억’이라는 한틀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에는 ‘빼앗긴 바다에
적들이 숨졌다. 적들은 숨진 자를 기리기보다는 숨진 일을 기념하였다. 백년이 지난 이제에도. 빼앗겼던 바다 빼앗았던 땅위에 적들은 추억을 새기었다. 기념은 되살리고 싶은 현실이라. 여기 세운돌의 뜻 천년을 지나 저들의 영광스런 초석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랴’ ‘너희들이 모르는 백년이 지난 이제인데’로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또한 안내판에는 “여기 서있는 기념비는 동경수산대학 동창회(낙수회)에서 일본의 영토였던 일제강점기에
세웠다가, 광복 후 잔재청산으로 주민들에 의해 쓰러뜨려 버려져 있던 것을 1971년 동경수산대학에 문구납품업을 하던 재일교포의 주선으로 다시 세우고, 동경수산대학 동창회는 해마다 방문하여 이 비석에서 과거를 기념하며 청소비용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비석에 대한 설명으로 “일본 측에서는 ‘학생실습선의 조난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정에서 발생된 조난사건이라는 점과, 저들의 지속적인 방문 기념행위와 그저 해양안전사고에 걸맞지 않는 순난자 기념비라고 새겨둔 것만 보아도 이 비석의 의미는 단순히 해양사고로 죽은 자를 위령하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민족문화연구소 대구지부는 “1907년 본격적인 대한제국 병탄에 앞서 독도를 자국영토로 편입하고
동해바다를 자기 집 안마당처럼 마음대로 드나들며 우리의 어업자원을 송두리째 빼앗았던 시기에 저들이 말하는 어로조사 실습선은 강탈한 바다를 영구히 소유하기 위한 침략행위의 수단이며, 저들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진출과정에서 조난사고를 당한 것으로 이에 선구적인 구실을 했던 조난자의 행위를 기념하는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또 “우리는 여기 서 있는 비석이야말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제일 먼저 동해 바다를
강탈하고 점령했던 증거물로 삼으며, 아직도 과거의 강제 점령의 역사를 뉘우치기는커녕 과거 자국의 영토였음을 그리워하며 기념하는 저들의 속내를 대한민국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한다. 저들에게 영광스런 점령의 역사는 우리에게는 다시 겪지 않아야 할 부끄러운 역사다. 그리고 이를 망각하는 일은 더 부끄러움이라!”고 기록돼 있다. 정승표 홍보국장은 “포항시가 조성과 철거를 반복했던 쾌웅환호조난 기념비는 단순한 조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이 동해바다 침탈을 위한 기초조사 차원에서 이뤄진 침략행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주호기자 월간 대구경북 http://www.todaydk.com |
경산 와촌 명마산 암각화(일명 : 글씨바위)는 자연물이며 인위적인 암각화가 아니다.
상고시대 한글의 원형으로 짐작되어 세상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글씨바위로 알려진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산9번지에 위치한 암반의 실제 모습을 2009년 5월 17일에 다시 한번 확인 차 답사하였다.
▣ 모습
[사진1] 사진의 오른쪽 아래는 5m정도 패인 계곡이며, 산위쪽(북쪽) 방향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찍은 사진임. |
바위 암석질은 퇴적암으로 지층이 둘러 쌓여 있음.암반 바닥에 줄무늬로 패인 자국인 마치 글씨처럼 보이나,
1. 일정한 범위에 질서 있게 있지 않고,
2. 크기와 패인 정도가 규칙적이지 않으며, 바위의 절개 된 틈새와 섞여 있으며
3. 무늬가 새겨진 암반면 그위에 다른 층의 지층이 덮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암반면 안쪽과 위쪽에 불규칙하게 지층이 덮여 있는 부분을 떼어내자 같은 무늬가 나타남,
4. 주변 계곡과 산에 흩어져 있는 바위에도 희미하게 나마 각종 무늬가 발견되는 점
이와 같은 조사 결과 이 암반에 새겨졌다고 짐작하는 글씨는 자연 현상물이며, 사람이 새긴 글씨가 아니다.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자연 무늬가 아니어서 옛날 글씨가 아닐까하는 생각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여겨지나, 자연물의 특이한 현상일 뿐, 사람이 새긴 글씨가 아님은 확실하다.
[사진2] 바위 표면에 줄무늬처럼 패인 부분이 글자 모양으로 보인다 |
[사진3] |
안반 표면 위쪽에 덜 깨어진 안반 지층이 겹겹이 있으며 겹으로 쌓인 안반 조각을 일부 떼어내니 그 밑에 비슷한 무늬가 나타남으로 자연물이라는 것이 결정적으로 확인이 되었다.
[사진4] |
주변에 흩어져 있는 바위에서 비슷한 무늬가 있는 암석을 흔하게 볼 수 있어 자연 현상임을 더욱 확인할 수 있다.
[사진5] |
한 뼘 깊이 마른 땅에
게을맞은 비가 적시려나
비닐 덥지 못한 밭골에
제 몸 쭈구려 촉 틔운 감자
싹도 밀지 못한 푸석함에
게을맞은 비는 이도저도 아니다
겨울 지난 마른 풀
젖어 싸그러야 하나
묻은 먼지만 털리 울 뿐
게을맞은 비 분위기만 힘겹다
콧잔에 살내음
게을맞은 비처럼
쭈그려도 싸그리지 못한 인연은 푸석한 숨결된다.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 바위면 글귀에 관련하여 몇몇 신문과 여러 블로그에서 인용하므로 옛날 일을 더듬어 다시 생각해 볼 문제로 당시 생각과 신문기사 원문을 싣는다 |
[ 최초 기사 ] 동아일보 1982.01.17…(기사원문 인터넷에서 검색 불가능:2000년 이전 기사)경산 와촌면 강학동 명마산 해발 320미터 지점에서 발견된 선사암 각문은 경사 20도의 평평한 암반에 위에 문자가 새겨져 있어….[ 인용 『한철학-107쪽_김상일1983.8_출판:전망사』 |
위 인용 기사를 확인하고자 1988년 10월 2일(일) 현장 확인함. – 당시 소견 : 바위면에 나타나 있는 모양이 특이한 모양이나 첫째, 문자 또는 암각화라고 보기에는 형태의 연결 또는 단위의 구분이 어려우며 패여진 모양(단면) 또한 반원(나무가지를 진흙에 반쯤 찍어을 때 나오는 모양)형태로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서 새겼을 때 시간에 의한 풍화현상으로 테두리가 부드러워지는 데 비해 테두리가 날카롭게 선명하여 사람의 손에 의한 새김 보다는 암석의 형성 또는 풍화 과정에서 자연발생된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둘째, 비위가 놓여진 위치의 산은 약간(경사면 30도 정도) 가파른 산으로 바위의 재질이 인근한(8키로 정도) 팔공산의 흔한 화강암이 아니라 그 산(명마산)의 주된 구성 암석인 퇴적암으로 바위가 놓여진 위치에서는 암반이 흔하게 노출되지 않은 지점이라서 유독 이 바위에 가득 글귀 또는 암각화를 새겼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음.추정 : 고대 문대 또는 암각화로 사람의 의한 창작물의 가능성 또한 있으며 그럴 경우 문자 또는 그림으로 고고학적 가치를 가지므로 간혹 신문지면에 오르내리게 된 것 같다. 좀더 세밀한 조사를 통해 밝혀 볼 필요가 있음 |
꽃이 핀다고 한다
뒷뜰 산수유 벌 비행 소리 잦아들고
동네 어귀 개살구꽃 화사하다
양지 바른 마당에 뾰족한 새싹 잔디
햇살 아래 말이 없다
어느 집 담장 높이 하얀 목련
꽃상여 날리듯 하늘을 향하고
저 멀리 안산 마루 아직 잔디는 누른데
말 없는 봄 햇살에 더한 가슴 미어진다
권덕규(權悳奎:1890∼1950)는 그의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1923)에서 “훈민정음은 그 이전 조선 문자의 부흥(復興)”이라 하며 ① 삼황내문(三皇內文), ② 신지비사문(神誌秘詞文), ③ 법수교비문(法首橋碑文), ④ 왕문문자(王文文字), ⑤ 수궁문자(手宮文字), ⑥
남해도 지면암 석각문(南海島地面巖石刻文), ⑦ 각목자(刻木字), ⑧ 고구려문자(高句麗文字), ⑨ 백제문자(百濟文字), ⑩ 발해문자(渤海文字), ⑪ 고려문자(高麗文字) 등 11가지를 내세우고 이를 다시 남북 양파로 분류하여 ① 북파(北派):단조(檀祖)→부여(夫餘)→고구려→백제 또는 발해, ② 남파(南派):신라→고려로 구분하였다. |
□ 남해 상주리 석각(도지정문화재)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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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상주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두모마을 표지석과 함께 두모포로 가는 길이 나온다. 두모마을 표지석에서 상주쪽으로 5백여m 가면 길 왼쪽에 금산 부소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20분 정도 산을 오르면 ‘상주리 석각’이라 부르는 글이 새겨진 거북바위에 닿는다. 천하를 통일한 중국 진시황이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시종 서불을 불렀다. “서불아 너에게 동남동녀 500명을 줄 터이니 불로초를 구해 오라” 서불은 산 넘고 물 건너 남해 금산까지 찾아왔지만 불로초는 구하지 못했다. 늙지 않게 해 주는 풀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한동안 사냥만 즐기다가 금산을 떠나면서 바위 위에 글을 새기고 갔다. 이런 이야기를 간직한 바위가 남해에 있다. 이 문자는 고대 역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유적이다. 바위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바위’라고 부른다. 이곳 암각화는 관심있는 학자들의 현장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서불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왔다가 사냥을 즐기다가 갔다”라고 쓴 글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들도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문자라고 하는 사람, 고대 거란족의 문자라고 하는 사람,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대문자라는 사람, 산스크리트 계통의 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 ‘귀인의 사냥터’라는 그림 표지라고 주장하는 사람 등등 아주 많은 학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답은 ‘알 수 없다’가 정확하다. 서불 일행은 불로초를 구하려 온 것이 아니라 망명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진나라의 혹정을 피해 망명한 자들이 한반도에 건너와 일부는 일본으로, 일부는 남해안에 그대로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 중 일부가 서불 일행이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부산을 비롯해 경남·제주 일원에는 신선사상이나 서불과 관련된 전설이 숱하다. 이처럼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거북바위 옆에는 거대한 바위벼랑이 있다. 그위로 올라가면 두모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한편 두모마을 표지석 바로 앞집의 고구마 밭이랑에는 비늘 달린 짐승의 몸통 같이 희귀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비늘무늬 바위는 거북바위, 동이바위와 더불어 상주리 일대 바위 문화의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
봄이 온다
겨울이 가서 오는 봄이 아니라
오기로 해서 오는 봄이 아니라
보풀한 흙 내음에
갯버들 움트는 가지에
살랑살랑 간지런 바람에
가슴 에이는 겨울은 묻는다
아니 실상
겨울은 에이지만 않았다
마른잔디에 어린 겨울 아침 서릿발
맨발로 가질 때
잡스러움은 가라
내 구디굳은 올곧음이였다
불을 질러라
그래도 남은 허접함은
달불에 남김없는 끄으름으로 지우고
다시 채울 꿈꾸는 봄을 맞으리
時間은 我執이다
겨울 밤 방안에 흐르는 건
문틈으로 부지런한 열교환
마당에 시린 하늘 마른 잔디에
묻은 서리 맨발로 딛고 나는 시간을 턴다
기억되어지길 기꺼워하고 바랬던 시간은
뒷밭 솔숲을 스치우며 달아나는
겨울 바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