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2

만주를 가다

 항일유적과 함께하는 만주기행

 여 행 글 : 한들․정승표

일 정 : 2009.07.23~07.30(8일)
지 역 : 심양 및 북간도
주 관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참여인원 : 33명

만주로~

내가 알고 있는 만주!

냉전시대 갈수도 올수도 없는 지역이라 우리의 생활과는 무관한 곳으로 여겼던 곳

지금은 ‘조선족’이라는 우리 동포가 많이 거주하고는 곳과 백두산 관광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있는 곳이지만, 근현대에 우리 민족의 수난시대에 희망을 품게 하였던 곳이기도 하며, 멀리 발해, 고구려, 옛조선의 강토로 단군조선 이래 오천년 가운데 사천년의 뼈를 묻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한민족의 과거 시간에도 그랬듯이 미래의 시간에서도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지역이 만주일 것이라.

6월초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에서 7월중 만주기행을 기획하니 신청하라는 문자 한통이 날라 왔다. 평소 만주에 대한 관심이 많아 기회가 되면 여행을 꿈꾸어 왔었는데, 비록 여행 일정이 북간도 지역에 한정되어 변경지역과 항일독립유적에 초점을 맞춘 여행이지만 어디 만주를 여드레 동안에 다 볼 수 있으랴, 처음 만주기행을 독립운동사와 관련하여 오히려 가장 뜻 깊은 여행이 될 것 같아 선뜻 나서게 되었다.

 심양

7월 23일 당초 대구에서 출발하려던 항공편이 차질이 생겨 인천공항까지 새벽시간에 전세버스로 이동하여 심양행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니 현지시각 오전 9시 무렵 도착하였다.

심양 현지시간은 북경시간을 기준 삼기 때문에 동경 시간을 사용하는 우리나라 시간보다 1시간 늦다. 하지만 지구의 자오선으로는 만주지역은 한반도와 동일한 경도에 있으므로 한국시간을 그대로 적용해도 일몰시간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첫날 일정으로 심양의 청나라거리로 알려진 청나라 초기 궁궐을 둘러보았다.

300년 만주족 시작을 알리었던 청나라 초기 궁궐은 비싼 입장료에 비해 먼지 소복하게 쌓인 용좌(龍座)가 중원의 마지막 왕조인 만주족의 흥망을 말해주고 있었다.

심양은 역사적 정황(비파형 동검, 명도전 출토지, 고조선말기 전쟁기사 등)으로 미루어 봐서는 고조선의 상당 기간 동안 중심이 되었던 왕검성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앞으로 많은 역사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곳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청나라 시절 봉천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족이 중심이 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심양’이라는 이름으로 백년전의 만주의 그림자를 지우듯이 하물며 2000년전의 조선의 흔적을 한 조각이라도 남겨질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 9.18기념비 ]

심양에서 그나마 한글 간판이 눈에 띄는 서탑거리 어느 한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9.18사변 역사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입구에 거대한 석조물과 뒤쪽에 박물관에 수많은 진열 자료를 보면서 중국의 관념을 읽을 수 있었다.

일본제국이 만주를 분할 점령하기 위해 세웠던 만주국 건설의 단초가 된 9.18사변이다.

석조물 옆 한켠에 쓰러뜨러 진열해둔 일본제국 시절 신사(神祠)기념비와 더불어 중국이 항일의식을 크게 부각시켜 소위 만주족은 존재하지 않고 중화민족이 항일전선을 펼쳤던 공동의 역사의식으로 9.18사변을 귀결시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만주국을 세운 일본제국이 이용한 것이 민족감정이 이라면 민족감정을 덮고 중화민족이라는 용어 속에 만주를 녹이고자하는 한족(漢族)중심의 질서재편 가치지향에도 짙은 민족감정이 녹여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차여행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에서 주관한 이번 여행은 어린 학생을 동행한 가족을 포함해서 33명으로 참여하여 여행사에 의뢰하지 않고 주최 측에서 직접 인솔하기 때문에 일행의 한사람으로 무탈한 여행이기 바라며 모두가 서로 협력하는 마음이었다.

일행은 심양북역에 가서 현지시각 저녁6시 기차를 타고 15시간 가야 했으며, 가는 길이 만주철도인지라 만주벌판 풍경을 기대했지만 밤시간이라 아쉬움이 남았다. 기차는 침대열차로 한칸에 여섯명이 좌우로 3층으로 선반 같은 침대에서 전날밤 전세버스에 잠을 때우고 다시 열차에서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너무나도 달게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연길역에 도착하여 우선 숙소인 호텔로 가서 짐을 풀어놓고 점심인지 아침인지 분간 안 되는 식사를 마치고 전세버스로 본격적인 답사 여행을 시작했다.

 용정

용정의 첫 답사지로 용정 우물에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시고 유적지 발굴에 힘쓰시는 현지 동포인 최근갑 선생님을 모시고 유적지 안내를 받았다. 용정우물은 알려진 대로 우리 동포가 용정에 정착하면서 용두레를 사용한 우물이기에 여기서부터 용정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고 하였다.

용정 우물 근처에 현재는 용정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답사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그 건물 지하에 독립투사를 감금하였던 감옥이기도 하였다.

이어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정착하면서 무엇보다도 심혈을 기울였던 교육사업의 유적지를 안내 받았다.

 대성중학교

1921년 용정에 세워진 민족학교로 현재는 용정중학교의 역사기념관으로 사용하다가 대성중학교 옛건물을 복원하여 항일운동과 관련한 수많은 자료와 윤동주기념관코너가 별도로 마련하여 두는 등 전체적으로 잦은 관광 경로로 이용되고 있어 기념관 아랫층에는 기념품 가게까지 갖추어 있었다.

서전서숙

[ 서전서숙 옛터 기념비_최근갑선생님(사진오른쪽) ]

1906년 우리민족이 연변에서 최초의 근대학교로 세웠던 서전서숙은 지금은 그 흔적을 알 수 없고 다만 그 장소로 비정되는 곳인 용정실험소학교 운동장 오른쪽 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세워져 있었으나, 소학교 울타리 안에 위치하여 평소에는 학교 운동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울타리 밖에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중국의 학교에는 경비업무를 우리나라로 말하면 경찰에 해당하는 공안이 맡고 있었으며, 내가 용정실험소학교의 교실건물안은 어떠한가 궁금하여 운동장을 가로 질러 현관을 향해 걸어가니 중국 공안이 고함을 치며 제지하였다. 실험이라는 말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연구시범학교에 해당하는 말인 것 같았다.

 서전대야

[ 서전대야 기념비_출입을 막는 모습]

1919년 3월 13일 북간도에서 최초로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며, 여기에서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고 용정 시내를 시위 행진하였던 곳으로 현재는 용정제1유치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유치원 건물 바로 밑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념비의 글씨는 시멘트로 메워져 있었으며, 경비를 맡은 공안은 우리 일행이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 기념비를 찰영하는 것을 강하게 제지하여 우리는 쫓겨나다시피 유치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청산리전투지

용정에서부터 찌푸린 날씨는 청산리전투지로 가는 길 차창가에 얼룩이 지도록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화룡시를 지나 산악지대를 접어들어도 골골이 인가가 없는 곳이 없으며 산중턱에 이르기까지 밭으로 개간하여 옥수수와 콩을 재배하는 것으로 보아 만주 지역에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 용정에서 백두산 가는 길로 70Km 화룡에서 송월저수지 지나 20Km지점
–  – 북위 42° 26‘ 29.50“  동경 128° 51’ 12.10
( 구글어스 빠른이동 위치검색 ☞ 42 26′ 29.50″N, 128 51′ 12.10″E )

청산리전투지는 용정에서도 70㎞ 이상 떨어진 곳이 한참 만에 기념탑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돌아와서 생각하니 만주에 있는 항일유적지 중에 그나마 가장 크게 기념비가 조성되어있는 곳이 청산리전투기념비 이였지만 입구까지 들어가는 길은 무슨 산림조합의 목재 가공하는 곳 안에 위치해 있고, 마을 위로 고가 철교가 놓여 있었으며, 실제 전투장소는 기념탑이 있는 왼쪽 골짜기로 한참 들어가 있다고 했다.

청산리전투기념비 뒤쪽에 설명문으로 벽면에 붙여둔 한자 설명문 돌판이 깨어져 금이 가있고, 한글로 새겨진 글을 읽어 보매 우리는 청산리 전투가 조선민족의 독립군 전투로만 알고 있었지 연변의 타민족의 지지 또는 지원에 관하여서는 들어본 바 없으나, 비문에는 “각 민족 인민의 대폭적 지원 하에”, “각 민족 인민은 이 기념비를 세워“, ”연변 각 민족 인민 삼가 드림”라고 세 번씩이나 타민족을 언급한 문구를 보아, 연변지역의 살아가는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우리 동포들의 현재 위상을 간접적으로나 느낄 수 있었다.

비는 지적지적 내리던 것이 연길로 돌아오는 비포장 길에 버스가 조금씩 미끄러질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북간도의 밤

연길로 돌아온 우리 일행 중 몇몇은 저녁 식사 후 중국의 관광문화로 잘 알려진 발마사지를 해보기로 하고 마사지 업소를 찾았다. 발마사지는 현지돈 30원(한국돈 6,000원)으로 한시간동안, 경락 마시지 볼 수 있는 전신마사지는 60원 한다기에 일단 발마사지를 청하였는데, 발만 마사지 하는 것이 아니라 어깨와 목과 팔을 스트레칭하듯이 한30분정도 하고 난뒤 나머지 30분동안 발을 크림을 발라가며 마사지하기에 그 노고에 비하면 너무도 싼값이였다. 심양에서부터 연길까지 오는 길에 곳곳에 공사를 벌여두고 낡은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이 혼재하는 도시를 볼 때, 앞으로 10여년 내에 우리나라를 능가하는 개발 속도를 낼 것 같은데 아직 인건비의 수준은 형편없이 낮아 마사지를 하는 인력의 한달 월급이 1,800원(한국돈 360,000원)정도라 하니, 오히려 이것이 무서운 저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느껴졌다. 어쨌든 발마사지를 받고 나니 이틀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 듯 하였다.

 명동촌 집단 이주 길

규암 김약연은 광무3년(1899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10여 세대와 함께 회령을 지나 북간도지역으로 새로운 이상세계를 꿈꾸며 집단 이주하여 정착한 곳이 명동촌이다.

[ 명동촌 길그림 ]

우리 일행은 그들이 이상 세계를 꿈꾸며 집단 이주한 길을 함경북도에서부터 답사했으면 좋겠지만 분단의 현실에서 갈수 없는 땅이기에 북측 회령과 맞닿은 삼합이라는 지역까지 가서 집단 이주 길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회령-삼합

[ 삼합에서 내려단 본 회령 ]

회령과 삼합은 국경을 맞닿은 지역으로 북측 회령쪽에 공식 시장을 두고 소규모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우리는 회령 땅에 들어갈 수 없으나, 삼합 마을 뒤편에 있는 두만강변 전망대에서 북측의 회령시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분단의 현실은 바라보이는 민족의 땅에 한 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다.강을 마주한 국경은 철조망은 양측 다 없었으며, 다만 북측에는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강변을 따라 50미터 간격으로 초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고 했다. 중국측에는 초병은 없고 주요 장소라고 여겨지는 곳에 감시카메라가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으나 국경이라는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건너편 북측 초병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으로부터 들어올 외부로부터 경계보다 북측 내부에서 중국으로 탈출을 막는 내부통제를 위한 초병이라 생각되니, 북측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축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는 모양새라 서글픈 민족의 현실이라.

 명동촌

삼합에서 출발하여 이른바 오랑캐고개라고 이르는 고갯길을 하나 넘어서니 넓게 펼쳐지는 골짜기가 바로 명동촌이였다.

[ 명동촌 풍경_도로가에서 서북방향으로 바라다본 풍경 ]

함경북도와 북간도는 두만강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라, 점령한 권력이 다르다고 산천이 다를 수 있으랴! 북간도의 산등선(스카이라인)은 한반도 어디에서는 볼 수 있는 산등선이며 길가에 산비탈에 널브러진 식생은 한반도의 남쪽과도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풍광이기에 명동촌은 국경에서 불과 백리도 안 되는 곳이라 우리의 삶의 터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100여년 전 외세의 침탈로 찢기고 기울어가는 국가에 새로운 가치지향을 내세우고 국운을 회복하고자 이곳에 집단 이주하여 인재양성에 총력을 쏟았던 명동촌의 분위기를 백년이 지난 현장에서 다시 한번 상상해 보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 . .’ 영원한 걸작의 시어이며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두가 청소년 시절 이 시어를 읊조려 보았을 것이고 그 읊조림에서 지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순순함에 감동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오늘 그 시를 지은 이의 살았던 터에 와서 그가 보고 느끼며 자란 산천에서 함께 느껴보고자 하나, 그의 비운의 생애를 생각할 때 그 시어가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선언과 같은 시어로 내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명동촌 입구 길가 바로 밑에 명동교회가 그리고 윤동주 생가가 있었으며 맞은편에는 송몽규 생가터를 복원 준비하고 있었고, 마을 안쪽에 위치한 명동학교터 기념비가 한창 자라난 옥수수 밭에 파묻혀 있었다.

[ 윤동주 생가/ 김약연 공적비/ 송몽규생가 복원중/ 명동학교터 기념비 ]

[ 선바위 ]

명동촌 윤동주 생가 마당에서 우리 일행은 이번 여행의 안내역할을 맡은 동포학생 부친이 연길에서 점심 도시락을 명동촌까지 직접 배달해 주시어, 금방 지은 따끈한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다시 명동촌에서 용정방향으로 가는길 3km지점에 선바위라는 직각으로 깍아지른 바위산이 있다. 안중근선생이 여기에서 수련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명동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던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김정우가 뛰놀던 곳으로 상상되었다.

 탈취 15만엔 사건 유지

[ 15만엔 탈취 기념비]

명동촌에서 용정쪽으로 7km가다가 왼쪽 골자기 입구에 “탈취 15만엔 사건 유지”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건 당시 설명으로 일본 은행 현금 수송 정보를 입수하고 사건 당일에 선바위 쪽에서 망을 보며 기다렸다가 수송 마차가 나타나는 걸 기념비가 세워진 산위에서 매복조에게 수신호로 연락해서 기념비 바로 밑 길에서 현금수송마차를 탈취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려고 했으나, 탈취한 자금을 연해주로 가서 공작을 하던 중 목적 달성을 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던 사건이었다.

역사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선악을 기준 지을 수 있는 것이라. 만일 이 사건이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한 독립운동가의 행위가 아닌 단순한 은행강도로 판단하다면 부도덕한 행위라 할 것이라. 이처럼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되는 것이라.

오늘날 세계분쟁문제에 있어서도 테러리스터로 지칭하는 약소국가의 자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폭력적인 군사력 우위에 있는 국가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용어일 뿐이기에 역사를 바라보는 개별 행위에 대하여 세계의 보편적 관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3.13 반일 의사릉

15만엔 탈취기념비에서 다시 용정 쪽으로 6km오다가 오른쪽으로 넓은 구릉지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13개 봉분이 안치되어 있는 3.13만세 묘역이 있다.

[ 3.13 반일 의사릉 ]

1919.3.13 용정 서전대야 터에서 독립선언을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의 표어를 내세우고 거리 행진 시위를 중국군 진압부대의 발포로 19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당시 사망자 유해 중 13명의 유해가 3.13만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묘역은 한 열흘 전에 벌초를 한 듯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우리 일행은 참배를 하고 주변 잡초를 일부 제거하였다.

 윤동주묘지

3.13묘역 바로 위로 1.5km 올라가 넓은 언덕과 같은 산은 공동묘지 터인데 여기에 윤동주 묘와 송몽규 묘가 있다. 묘지가 있는 곳은 100m높이의 넓은 구릉지로 능선을 따라 좌우 1km영역이 공동묘지였다. 묘지를 올라가는 길은 앞날에 내린 비로 질척이는 비포장길이라 일행 모두가 신발에 진흙이 한 뭉터기씩 달고 힘겹게 올라갔으나, 윤동주 묘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묘지를 찾던 중 때마침 한 무리의 양떼를 만났는데 이렇게 수많은 양떼 무리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양들이 하얀 양이이여 할 텐데 시커먼 때국물이 얼룩져 마치 돼지 떼를 보는 듯하였다. 묘지를 못 찾아 헤매고 있을 때마침 능선 길을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우리 동포 한분을 만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묘지는 공동묘지 전체영역 부분에서 왼쪽(북쪽)으로 뻗어 나온 구릉지에 밀집된 묘지들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으며 묘지 바로 옆에는 살구나무와 이름모를 나무 한 그루씩 자라나 있었다. 윤동주 묘지 바로 옆에 송몽규 묘지와 기독교 지도자의 묘지가 근처에 있어 당시 이름 있는 선각자들의 묘지가 한데 모여 있었다.


[윤동주 묘지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용정시내 모습 ]

 제창병원 터

용정지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피난처 구실을 하였고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되었던 곳으로 1914년에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가 설립한 제창병원은 명신여학교, 은진중학교와 함께 용정 동남쪽 ‘영국언덕’이라는 구릉지대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이 없어 고증하기 힘들 정도로 아는 이 드물었다. 제창병원터를 물어물어 찾아가니 지금은 용정제4중학교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운동장 왼편 구석에 옛 은진중학교 터였다는 기념비가 동문회 이름으로 세워져 있었다.

 새벽시장

연길의 이틀째 밤을 보내고 앞날에 늦잠으로 가보지 못한 숙소 근처 해란강 둔치에서 아침 6시에 열리는 새벽시장을 구경 갔다. 입구에서 개고기를 진열해서 판매하는 모습만 다를 뿐 우리나라 시골장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노점상태로 헌책을 진열해서 판매하는 곳과 기념품 판매하는 곳이 두어군데 있었는데 아마도 한국에서 온 관광객을 겨냥한 노점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연길에는 이렇게 특정시간에 잠시 열리는 새벽시장이 있는가 하면, 용정방향으로 연길 시외곽지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거리시장이 있어 들러보니 우리의 시골 읍단위에 서는 장터와 다름없는 물건들이 취급되고 있었으며 그 규모는 직선거리 2km를 가득 메운 인파로 북적여 중국의 급변하는 풍속도를 거리시장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숙소를 나서기 전 숙소 옆 가게에 잠시 들릴 때, 때마침 유료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기 함 차자바라 장롱있는데 나똔는데 이쓸끼다’ 너무나도 익숙한 경상도 억양의 사투리가 들려왔다. 중국에선 장거리전화를 이렇게 가게에서 전화비를 받고 빌려주고 있어 가게 앞에 내어 놓은 전화기로 전화를 하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전화를 거는 아주머니는 한 육십대 되어 보이는 영락없는 경상도 아지매 모양새라 집에 있는 딸하고 통화하는 것 같았고 전화를 마치고 나서 궁금하여 어디 가시냐고 말을 붙여 보니 흑룡강성에서 사는데 마을 모임에서 오늘 백두산 가는 길이라고 했다. 혹 선대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니 어머님의 고향이 비안이라고 알고 있는데 비안(경북 의성)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만주에 우리 동포의 분포가 북간도지역인 연길, 용정 지역은 함경도 사람이 주로 정착하였고 흑룡강성에는 경상도 사람이 정착하였으며 그 분포 모양이 한반도를 국경을 중심으로 반으로 접었을 때 만주와 맞닿는 부분이 일치한다고 이번 여행 안내를 하는 동포 학생이 말했다.

 연길감옥

여행 삼일째 우리는 도문으로 가기 전에 연길 시내에 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많은 독립투사들이 감금되었던 연길 감옥터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연변 예술극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옆에 연길감옥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에 특이하게도 감옥 노래가 새겨져 있었다.

[ 연길감옥터 연길감옥가 기념비 ]

 반도의 북단

만주기행의 삼일째 연길 시내를 빠져나와 해란강 줄기를 걸쳐 지나는 고속도로을 이용하여 변경 지역인 도문으로 향했다.

만주의 도문시는 원래 회막동(灰幕洞)으로 불렸으나 1933년 6월 1일 도문(투먼:圖們)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 만주국이 이곳의 이름을 ‘도문(투먼:圖們)’으로 바꾸게 된 것은 두만강이 ‘청·일 간도협약’에 나오는 도문강, 백두산 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 도문시(중국측)에서 바라본 북측 남양시와 국경 다리 ]

도문시에서 북측과 통행할 수 있는 다리는 2차선 폭의 낡은 다리였다. 다리의 중간부분에 붉은 선을 그어서 ‘변계선’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이 국경이다. 이 다리와 다리입구에 세워진 전망대에 올라가기 위해선 입장료를 내어야 한다. 중국 측에서는 이 다리 주변을 유원지로 개발하여 유람 보트와 뗏목을 운영하고 있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뗏놈이 번다는 말을 실감하겠다.

다리 건너 북측의 남양시인데 도시의 건물들은 오래된 폐허의 도시 마냥 인적은 보이질 않았다.

우리 일행은 뗏목을 탈 계획이었으나 불어난 두만강물의 물살이 거세어 모터보트를 타게 되었다. 모터 보트는 유람선 선착장에서 50여미터 다리 밑까지 왕복하는데 강물에서 북측 물가 자리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북측에서는 수풀 속에 보이지는 않지만 50미터 간격으로 초병이 경계를 서고 있다고 보트를 운전하는 동포가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 일행은 도문에서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봉오동 전투지를 찾아 나섰다.

봉오동전투지

[ 봉오동 전투지 위치 ]

봉오동 전투지는 도문시에서 북쪽으로 12km떨어져 있는데, 현재 실제 전투지는 저수지로 수몰되었고, 저수지 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했다.

기념비가 있는 봉오동 골짜기는 입구부터 저수지 개발에 따른 울타리가 쳐져있고 출입이 제한되고 있었다. 출입을 통제하는 관리사무실에 사정설명을 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입구에 얼마 안가서 도문시 인민정부가 세운 ‘봉오동5구구간대주둔지’라고 문화유물보호단위라고 이름 한 안내 비석이 있었으나 안쪽으로 300미터 들어간 곳에 기념비가 있는데 기념비 바로 코앞에 저수지 관리를 위한 건축물이 한창 건축 중이라 널브러진 벽돌과 합판, 모래로 기념비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또 한번 타국 땅에 있는 우리의 정신 문화의 위상이 어떠한 것이며, 어떤 취급을 받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장이였다.


 국경을 달리다

봉오동 전투지에서 출발하여 날이 저물어 늦으면 들어갈 수 없는 3국 국경지역인 방천으로 서둘러 출발하였다. 방천이라고 일컫는 3국 국경까지 120km정도 가는 길이 두만강 변을 따라 계속 이어져 있었다. 강 건너 보이는 북녘 땅은 보이는 그 자체로만은 여름날 평화로운 대한민국 시골 강변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국경이라는, 두만강이라는 머리 속의 기억만 지운다면 한국의 어느 시골 강변 길을 달리고 있는 시외버스로 착각할 정도이다.

[ 두만강변(도문에서 훈춘 가는길) 북측 풍경 1 ]
[ 두만강변(도문에서 훈춘 가는길) 북측 풍경 2 ]

두만강변 길을 끝없이 달리던 차는 훈춘 지역을 거쳐 가는데 두만강 바로 건너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서있는 훈춘은 어찌 우리 민족이 이 땅을 차지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만 곳곳에서 느껴진다.

[ 훈춘 들녘 _ 훈춘에서 방천가는 언덕길에서 ]

 방천

 모스크바에서 6,416 ㎞
북경에서 1,224 ㎞
서울에서 621 ㎞
누구의 땅이어야 마땅한가?

이곳에 그어진 질서는
힘-권력-폭력의 산물이련가

우리 무관심의 산물인가
님들아! 잃어버린 옛날이 아니라

잊어버린 오늘을 탄한다.


훈춘을 지나 3국 접경지역이 가까워지는 두만강 하구 지역이 가까워오자 인가는 드물어지고 강변 에 바로 접한 길이 왼쪽으로 철조망이 길과 나란히 이어지는데 철조망 건너편은 러시아 지역이고 길은 중국 소유이며 강 건너는 북조선의 땅이라.

두만강변을 따라 15km정도 좁다랗게 이어지는 중국측의 땅은 중간 지점에 두만강변 모래가 편서풍에 의해 날려 거대한 모래언덕(砂丘)을 이룬 곳에 공원을 만들어 놓고 접경 지역 전망대에 들어가는 것조차 관광 사업으로 조성한 것을 볼 때 중국이 돈에 집착과 땅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 같았다. 접경 지역 끝에서 동해까지 직선 거리 10km, 이 짧은 거리를 북조선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닿아 있어 동해로 나아갈 수 없는 중국의 아쉬움은 두만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중국이 도로 시설만 보아도 그 심정을 알 것 같다.

우리 일행은 전망대에 도착할 무렵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 출입이 통제되는 듯 하더니만 다시 설득 끝이 전망대 관람이 허가되어 중국측에서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남쪽 두만강 건너편은 북조선이며 북쪽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해안 습지는 러시아의 하산 땅이다. 동쪽으로 해안 습지 저 멀리 수평선이 바라다 보이는 바다가 동해 바다이다. 하지만 전망대 방향 현판의 각 방향 표시로 ‘일본해’라고 적혀 있다. 이 또한 우리의 관심이 일본에 밀린 산물이니 뭐라고 하기에 부끄러울 뿐이다.

3국 국경 방천을 뒤로하고 연길로 돌아가는 훈춘 들녘 길에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유가 있다면 훈춘 지역을 둘러보았으면 좋으련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훈춘 들판을 가로질러 버스는 곧장 숙소를 향했다. 연길에 도착하니 이미 밤시간이라 저녁을 먹고 나서 다음날 백두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 해야함으로 모두들 일찍 잠들었다.

 – 훈춘의 노을 –

드넓은 들녘은 국경의 하늘에 두고
발해의 발굽소리 길섶 흙먼지에 묻고
조국을 찾겠노라 동토를 떠도는 투사의 외침
해거름 어둠살에 묻힐 때
노을은 조선 하늘에 머물러라


백두산행

연길 숙소에서 짐을 정리하고 아침 6시 백두산을 향해 출발했다.

길은 산간 지대를 들어서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골짜기는 한반도를 그대로 이은 땅이기에 그리 낮 설은 풍경은 아니며, 더군다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식생 그대로일 뿐 여기에만 있다 할 만한 식생은 보이질 않았다. 다만 북위도가 높은 관계로 남방한계 식물은 있을 수 없기에 산골의 마을 뒷산에 있을 법한 대나무는 없다. 차는 점차로 고원지대로 들어서는 듯 기온은 계절이 삼복더위 한가운데인데도 가을 날씨 마냥 느낌이 그랬다. 고지의 땅 구석구석에 얼마간의 평지나 구릉이 있다면 어김없이 옥수수밭 아니면 콩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중국 그들이 말하는 동북3성에 어마어마한 인구를 유입한 결과라 여겨지며, 그렇게 인구 유입 되도록 한 것은 그들이 만주의 미래 가치에 대한 국가 전략이 내재된 결과라 생각된다.

흉노, 선비, 거란, 몽골, 마지막 백여년 전까지 제대로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에 의해 중원의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던 수천년의 역사를, 다시 수천년을 이어갈 역사에서 자신들이 이 자리를 메움으로서 내어주었던 것도 자신의 것 인양 하화족(한족) 질서의 영원을 노래하는 동북공정을 읊고 있나 보다. 백두산자락 천년의 밀림을 가로지르는 시멘트 포장도로, 만주에 흩어진 도시들의 앞 다투는 도시 리모델링, 만주는 그렇게 동북공정의 도구로 리모델링되고 있었다.
백두산 가는 길은 새로 확장하고 포장한 지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아침에 출발하여 중간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점심 나절에야 백두산에 도착하였다. 백두산을 중국 측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건 익히 아는 사실 인지라 입구부터 장백산이라는 이름 아래 중국 측에서는 대대적인 관광 산업으로 투자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입구에서 15㎞를 순환 버스로 들어가서 다시 지프차를 타고 천지까지 올라가는데 지프차가 올라가는 백두산 정상 부위 능선은 매우 가파른 비탈길을 거칠게 운전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천지에 오르니 짙은 구름으로 천지 모습은 볼 수 없고 구름 안개속에 왁자지껄한 중국인들의 소란스러움이 불만스러웠다. 천지에서 구름 안개속에 보이지 않는 백두산 천지 호수 바닥 방향으로 바라보며 담배(한라산) 한 개피 피워 물고 한참 머물고 있으니 잠시 구름이 밀려가고 언뜻언뜻 드러나는 천지의 물표면이 보이더니 점차로 건너편 천지를 이루는 산봉오리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백두산 천지!

다시는 장백산에 가지 않으리
그래 맞다
누군가 백두산을 찾아가자 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찾아갈 백두산은 없다
여기 하늘 못을 담은 산 두 동강 내어
한쪽은 비자가 나오지 않는 땅에
한쪽은 이민족이 왁작지껄이는 땅에
찢어 놓고
성산이라 외치는 곰의 재주를
장백이란 이름으로 이익을 말하는 곳에
나는 다시 오지 않으리. 

민족을 말하고 국가를 말할 때 흔히 상징적으로 많이 인용하는 백두산 천지이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천지는 그저 자연의 모습일 뿐 내게는 그리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천지에 시끄러웠다. 우리 일행 또한 천지에서 한자리에 다모이지는 못했지만 한 십여명 한자리에 있어 ‘항일유적과 함께하는 만주기행’이라는 문구가 적힌 여행 현수막을 펼쳐들고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하던 찰라 어디선가 나타난 정체모를 사람이 현수막을 아무런 말도 없이 낚아 채더니 도망가 버렸다. 참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정체모를 사람은 중국측 공안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태극기와 각종 구호가 적힌 현수막 또는 깃발을 들고 와서 한민족의 성스러운 산이라고 찰영함으로 인해서 중국측과의 이해관계가 충돌되는 부분이 되어, 천지에서 현수막을 펼쳐 들고 사진 찰영하는 것을 막는 일을 한다고 했다. 또 한번 대한민국, 한민족의 현주소를 느끼게 되는 일이다.
천지에서 내려오는 길은 금새 비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를 뿌렸다.

[ 祖國利益高于一切(조국이익고우일절) 구호 ]

빗줄기사이로 지프차를 타는 건너편에 중국측의 관리사무소 격인 건물 축대에 적힌 붉은 글씨가 내눈에 들어왔다.

“祖國利益高于一切(조국이익고우일절; 그 무엇보다도 조국의 이익을 우선한다)”
중국의 현재 집념 어린 정책을 이 글귀 하나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祖國’ 그들은 만주사람, 티벳사람이든, 위구르 사람이든 다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그 중국인이 이어온 모든 정권은 중국 역사이기에 조국은 중국이 되는 것이다.
중국이 ‘국가(國家)‘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굳이 조국(祖國)이라는 말을 쓰는가를 생각할 때 한편으로는 그들이 가장 염려하는 민족 분열에 대한 경계심이, 분열하고자 하는 민족에 대하여 같은 조상을 두었다는 걸 억지로라도 강조하고 싶어 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천지에서 순환 버스가 있는 곳까지 지프차로 내려와서 다시 순환버스를 타고 장백폭포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천지에서 내려오는 풍부한 수량으로 폭포수는 장엄한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폭포수 밑으로 계곡에는 지열이 노출되어 뿜어 나오는 온천 증기가 보기 드문 구경 꺼리였다. 계곡을 따라 노천 온천과 온천개발이 이루어져 있었으며 일행은 잠시 온천욕을 하고 시간이 쫓기어 서둘러 이도백하라는 곳에 있는 숙소로 내려갔다.


이도백하에 있는 숙소는 산림지대 한가운데 위치하여 인근에 인가가 전혀 없는 곳이라 저녁 식사 후 모처럼 일행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간의 여행에 있어 느낌을 교환하며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송정

[ 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들녘 ]

백두산을 뒤로하고 일행은 다시 기차를 타기 위해서 연길로 돌아왔다. 연길로 오는 길에 첫째 날로 예정했지만 시간이 모자라 못 갔던 용정의 일송정에 들렀다.

일송정에 오르는 길에 비포장 진흙 오르막길을 차바퀴가 빠져 애를 먹다가 샛길로 둘러 겨우 올라가니 일송정 바로 오르는 길 주차장에 위치한 숙박업소는 폐업한지 오래되었는지 흉물스럽게 부서져 정자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라는 느낌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 ]

정자가 있는 곳으로 우리 일행은 올라가 선구자를 부르는 기념을 하였다. 정자의 위치는 용정의 서쪽의 야트막한 산에 위치해 있으나 동서로 해란강을 낀 넓은 들판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곳이라서 우리 민족이 용정에 처음 정착을 하고 많이 애용되었으리라 생각되었다.
일송정을 내려오는 길에 또 하나의 잘 알려지지 않은 비석이 있다하여 보니,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가 세워져 있었다.
『 인간사회에는 늘 새로운 문제가 생기며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하여 투쟁으로써 발전될 것이다』
시비에 새겨진 작가의 글귀가 당연한 말이면서도 새삼스러워지는 건, ‘투쟁’이라는 단어에 대한 단상일까? 투쟁, 저항 이러한 용어가 당연한 인간의 실존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이른바 이념적인 용어로 취급당하고 있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일행은 용정을 뒤로하고 다시 연길로 돌아왔다. 열차시간까지는 3시간정도 여유가 있어 그 시간 동안 연길 상설시장인 서시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시장은 한국의 재래시장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시장을 돌아보면서 기념품 될만한 것을 찾았으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 양산인지 우산인지 모를 접는 양산을 하나에 30원을 부르는 것을 15원으로 깍아서 사무실 직원들에게 줄 기념품으로 20개 쌌다. 기념품을 싸서 돌아 나오는 길에 엊그제부터 기회가 되면 만주에서 우리 민족에게는 보편적인 음식인 개고기를 먹어보고자 했으나 단체 여행에 여유롭지 못해 못 먹을 뻔하던 걸 시장 한쪽에 가니 개고기를 요리를 하는 집이 몇 집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니 한국에서는 보신탕, 보양탕이라고 부르는 것을 여기서는 그냥 개탕이라 했다. 개탕 한그릇에 10원(한국돈 2,000원)하는 개탕을 시켜보니 한국의 보신탕보다는

[ 연길 서시장과 개탕 한그릇]

전국 비슷하게 나오면서 개고기를 썰어 넣은 듯하였다. 맛은 썩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국물이 진한 것이 먹을 만했다.

우리 일행은 다시 심양으로 가기 위해 연길에서 열차를 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열네시간정도 소요되는 침대 열차는 처음에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더니마는 이젠 익숙해진 느낌이다.

열차는 저녁 시간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밤시간 이동이라 만주들녘을 열차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 것 같아 아쉬웠다. 심양에 도착해서 바로 다음 목적인 단동으로 전세버스를 이용하여 출발하였다. 심양에서 단동 가는 길은 그 옛날 조선시대에는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원으로 가는 길이였을 것이며, 이천년 전 고구려의 주된 활동 근거지로써 곳곳에 고구려 성곽이 많이 산재하는 것으로 익히 알고 있는 지역으로 비교적 산악지대이기도 하다.

단동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압록강철교 앞에 있는 북측에서 운영하는 송도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식당은 북측이 단동시에 직접 경영하는 식당으로 종업원 모두가 북측 사람이다. 점심식사는 식사뿐만 아니라 식후 공연까지 포함하는데 식당의 여성 종사원 서너명이 민요와 춤 그리고 통일관련 노래를 부르는데 익히 들어 아는 노래도 있고 함께 어우르는 춤을 겸하여 일행 모두가 공연하는 종사원들과 손을 잡고 다함께 잠시 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공연모습은 사진 찰영을 금지하여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압록강철교 중국은 한국전쟁 때 미국의 폭격으로 끊어진 철교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여기에서 마찬가지로 공원처럼 조성하고 돈벌이와 연결시키고 있었다.

압록강변 공원으로 조성한 계단 아래 압록강물에 나는 신발을 벗고 무릅까지 잠기는 깊이까지 들어가 보았다. 엊그제 두만강 물에 세수하고 압록강 물에 발을 씻어보았다.


다시 일행은 호산산성으로 이동하였다.
고구려 박작성터로 알려진 곳에 중국이 성을 보수하여 호산산성이라고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건 지금까지 보아왔던 중국의 위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이라고 하겠다.
역시나 여기에도 공원으로 조성해 높은 입장료로 돈벌이는 하는데 공원 가운데에 기분 나빠 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조각상을 만들어두고 그 아래 문구가 여기가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는 설명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중국은 진시황 때 만리장성 건축을 시작하여 아직도 만리장성을 쌓고 있나 보다.
산해관에서 바다로 들어선 장성의 끝이 바다 밑을 통과하여 압록강변에 솟았단 말인가?
만주 너른 들녘 아직도 장성을 쌓기 위해 벽돌을 갖다 나르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들은 지금도 만리장성을 쌓고 있음을 나는 여드레 동안에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사할린을 마주한 방천 국경에서, 도문에서 백두산에서…
중국은 도처에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지금도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만리장성 밖은 오랑캐의 땅이기에 그들은 오늘도 만리장성을 들고 만주로 나오고 압록강으로 나오고 있다. 만일 우리의 힘이 미약하다면 부산 동래성이 저들의 만리장성 동쪽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겠는가!

어쨌든 중국이 말하는 호산산성을 올라보니
만리장성이라고 말하는 어이없음은 산성의 모양부터 나를 웃겼다.
나는 행여나 성곽 기단부분에 박작성 흔적을 찾을 수 있으려나 생각한 내가 한심스러울 지경이였다.

[ 호산산성 성벽 일부 모습 ]

성곽은 기단부터 3~4미터를 축돌로 쌓았는데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축돌을 마구잡이식으로 쌓으면서 시멘트로 틈새를 메워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만리장성의 흉내를 낸 전돌(검은벽돌)로 성곽을 만들었다. 너무 황당했다. 이들이 역사를 왜곡하려면 그럴듯하게 거짓 성을 쌓아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이건 뭐 청동기시대 박물관에 증기기관차를 전시해두었다고 할까! 중국인들의 황당한 억지에 기가 막힌다.

공원의 안쪽에는 ‘一步跨(일보과: 한걸음에 넘다)’라고 안내한 곳은 압록강 지류에 의해 10미터 정도의 얕은 개울 하나 사이를 두고 건너편 북측 경작지와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좁은 개울에 중국측은 다른 국경과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통제 시설이 없어 중국인 몇몇이 발전기를 돌려 전기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고 북측에는 가는 철사로 이은 철조망이 드리워 있었다.

호산산성의 씁쓸함을 뒤로하고 일행은 다시 심양으로 돌아와 만주에서 마지막 밤을 서탑 거리에 있는 민박집에 묵었다. 민박집이라 하지만 일반 민가가 아니고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숙박시설인 셈인데 주거용 아파트를 분양받아 민박형태로 운영하는 것 이였다.

민박을 하고난 다음날 아침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서 공항까지 전세버스가 오기로 했었는데 신용 없는 중국인이라 그런지 앞날에 약속한 것을 져버리고 오지 않았다. 덕분에 난폭하게 운전하는 심양 택시를 타보게 되었다.

이로서 여드레 동안의 만주기행을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느낀다고 했던가!

여드레 동안의 만주기행!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얄팍해서 못보고 느끼지 못한고 지나친 부분도 있을 것이라 여겨지니 좀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행 내내 느껴진 내가 속한 나라의 위상, 내가 속한 민족의 현실이 곳곳에서 지울 수 없는 서글픔으로 남겨져 웃고만 넘길 수 있는 여행은 아니었다.

접경지역인 두만강과 압록강을 중국측에서는 마치 자기들의 전유물인양 마음대로 고기잡고 골재 채취에다가 유원지 개발로 관광수입을 올리는데 반해 북측에서는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한 초병이 아니라, 내부의 탈출을 막기 위한 초병이 마치 가축우리를 지키는 모양새 같아 같은 민족으로서 부끄럽고 서글펐으며, 더군다나 조선족 동포의 말에 의하면 연변에서는 북측사람들을 마치 동물원의 동물 보듯 한다는 말이 미래에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을 얼마나 멸시하는 풍조를 가질까하는 염려가 된다.

중국내에서도 조선족의 위상이 예전에 그나마 나았다고 할 수 있으나, 현재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했다. 예를 들어 공직(공무원)으로 나갈 경우 조선족의 신분으로는 고위직에 오를 수 없으며, 중간 간부에서 끝난다고 삼합에서 드라이브 관광 온 조선족이 하는 말이다. 그렇게 점차로 드러나지 않은 차별이 존재하므로 동화되는 길이 살아 남는 길인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연길을 중심으로 북간도의 여러 도시를 둘러보아도 예전엔 간판에 한글을 먼저 쓰고 아래에 한자를 썼는데, 이제는 한글이 쓰여 진 간판은 오래된 낡은 간판만 보일 뿐 새로 생겨나는 간판은 한글이 아예 없고 한자만이 쓰이고 있었다.

북측이 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이 중국은 만주에 식민(植民)을 초과 달성한지 오래되었고, 다른 역사 인식을 가진 그들이 말하는 소수민족과의 상호이해하고 공감하는 정책보다는 인구의 많음을 무기 삼아 변방 지역의 이민족의 흔적을 일방적으로 깔아뭉개고 밀어붙이는 그들의 역사 인식은 장차 동아시아의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될 것 같다.

중국이 조국(祖國)이라고 말하는 속내에 한족(漢族) 중심의 질서재편이 지금으로써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듯 하다.

우리 민족이 풀어야할 문제가 어디 한 두가지이랴! 이민족의 권력이 지배하는 만주고토에 관심밖으로 밀려난 항일독립운동유적, 동북공정 역사 인식문제, 재외동포의 처우, 이 모든 것 보다 더 시급한 건 분단된 강토에 인민의 삶이 더한 문제이건만,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먼 길을 가는 오늘의 시대가 답답하기만 하다.

2009.08.12. 한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