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01

침략 그리고 영원한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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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비는 비문의 내용처럼 1907년 실습선 조난사건을 기념하여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세워졌으며, 1945년 광복 후 마을 주민들에 의해 쓰러뜨려(워낙 규모가 커 부수지 못함) 놓은 것을 1971년에 재건하고 해마다 일본인들이 방문하여 참배 해오고 있으며, 2001년 해안도로 개설로 현재 위치에 조경시설과 함께 세워졌다.

1971년 비의 재건은 당시 일본 동경수산대학에 문구납품업자인 재일교포 한영춘씨가 문구납품 독점 조건으로 이 비를 재건하였고, 당시 포항시문화재보존위원장인 박일천씨가 비석의 재건을 칭송(讚)하는 글은 작은 비석에 적었는데 그 내용이 비굴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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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비석의 비문을 찬(讚)한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움에 의해서인지 자신의 이름을 파내어 지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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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마을 주민에 의해 철거, 외부 이권으로 재건, 찬(讚)한 사람의 이름이 파내어진 것, 비문 자체에 일본왕의 연호가 메워져 있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으며, 계속해서 존폐 논란이 있으며, 비석을 세운 일본측(동경수산대동창회 낙수회)에서 매년 마을 주민에게 청소비용으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고 유지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하고 있는 등, 단순히 과거를 기록한 돌덩이로 보고 지나치기에는 많은 의혹과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2001년 해안도로개설 과정에서 포항시의 알선으로 그 동안 개인 경작지에 세워져 있던 비석를 옮겨 해안절경에 콘크리트 옹벽과 구조물을 갖추어 새로 세웠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일본제국주의 표석을 다시 이 땅에 세워진 것 같다

침략선이냐 실습선이냐?

 조난을 당한 배는 쾌응환호로 ‘당시 동경수산전문대학 실습선’이며 ‘조난으로 죽은이가 생도였다’,‘고등어 어업조사 또는 수로탐사를 위한 것이다’는 등으로 당시의 사건을 애써 침략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항변하나,

 사건 당시 1907년은 이미 우리의 주권을 유린(을사늑약)한 일본은

우리 강토를 마음대로 드나들고, 우리의 바다는 이미 저들에게 빼앗기고,

저들이 이 땅에 행한 모든 행위는 침탈과 지배의 과정에 지나지 않으므로

실습선이 곧 침략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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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정의(定義)는 미래의 문제

– 역사적 사실 논쟁은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한다 –

역사적 사실에 논란이 있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에 삶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라.

독도문제, 임나일본설 …왜 문제가 되고 논란 꺼리가 되어야 하나!

마찬가지로, 

동해절경 호미곶에 세워둔 이 돌기둥의 정의(定義)

훗날 저들이 정복지에 대한 표석이며,

저들의 표현대로 한반도에 진출한 점령비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랴!!!

역사사실의 논란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우리 후손에게 가치혼돈을 안겨 줄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나아가 저들의 과거 침략행위에 당위성을 찾을 자료가 될 것이며

미래에 되풀이 할 침략 근거의 빌미가 될 것이다.

용납할 수 없는 기념

죽은 자에 대한 위로를 위한 단순한 비석이라면 허용 못할 이유가 없다.

죽은 자를 위로하는 어느 비석이 높이 3미터 사각의 육중한 돌기둥으로 세워 마치 이 땅을 지배한 영원한 표석처럼 둔단 말인가?

이 비석은 위령비가 아니다.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기념하는 기념비이다

이러한 비석을 그대로 두는 것은 우리의 치욕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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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광복이 되지 못했다면, 이 비석은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 일본인들이 한반도 진출에 공헌을 한 사건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비석을 둘러싼 지역을 영광스런 행위로 성역화 하여 기념하였을 것이다._100년 전 저들의 영광은 우리의 치욕이다  

저들은 동경수산대학 기록에서도 표현한 바와 같이 오늘에 이국(異國)이 된 한반도에 있는 기념비를 아쉬워하듯, 다시 이 나라 강토에 대한 침략 기회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역사란 정리하는 자의 소유물이다.

이 비석을 미래에도 그대로 둔다는 것은, 과거 100년전의 침략과정에서 일어난 숱한 행위를 개별적인 일로 구분하여 기념할 일이라고 인정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의 후손에게 매우 심각한 가치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겁탈한 자의 행위가 사랑이라고 해석되는 건, 겁탈당한 자가 자발적이라고 말하고, 그걸 사회통념으로 만들면 우리는 또 다시 치욕의 세월에 내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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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쾌응환호조난기념비는 마땅히 철거되어야한다.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는 조난 사건 100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역사를 바로잡아 우리의 후손에게 더 이상의 논란의 여지와 가치혼란을 물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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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9

2007-06-19

동경수산대학에 요청

 보냄 :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2007.6.15

받음 : 일본국 동경도 동경수산대학 낙수회(日本國 東京都 東京水産大學 樂水會)
제목 :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 바꿔라
         ( 快 鷹 丸 號 遭 難 紀 念 碑 變 更 )

너희 일본국 동경수산대학 낙수회에서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시 구만리에 서기 1907년에 조난하였다고 하는 일로 기념하여 세워 둔 비석이 아래와 같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대로 바꾸어라.

– 문 제 –

하나. 비석이 너무 크다(높이 3M)
– 세계 어느 나라에도 추모 또는 위령을 위하여 세운 기념 비석이 이 같이 큰 규모는 없다.
너희 일본국의 관습으로는 추모비가 그렇게 크게 할지 모르겠으나, 여기 대한민국 관습으로서는 비석의 규모가 조난자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점령지의 표석과 같은 위압감을 가지는 인상을 주어, 과거 일본국이 점령지에 대한 향수를 아직도 가지고 대한민국을 깔보고 있다는 증거로 보이며, 대한국민으로 하여금 매우 불쾌한 마음이 들게 한다. 이러한 너희 일본국(낙수회) 태도는 한일간의 불편한 마음을 지속하게 하고 미래에 또 다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재료가 된다.

둘. 대한민국 영토를 무단 사용하고 있다
– 비석이 세워진 위치는 포항시 구만리의 빼어난 경관이 있는 해안가를 점유하고 있어 자연경관을 심하게 해치고 있으며,
– 비석이 점유하는 토지에 대하여 영토의 주권이 있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계약한 사항이 아니고, 대한민국 민간인(김두식)으로 부터 영구 기증 받았다 함은, 아직도 대한민국 영토에 대하여 일본국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망령된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한 국가의 개인이 다른 국가의 주권을 가진 집단에게 토지를 영구 기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너희 일본국민이 대한국민에게 토지를 영구 기증할 수가 있는가?

우리는 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래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골라서 서기 2007년 8월 31까지 바꾸어라.

– 요구 사항 –

하나, 조난기념비 크기를 높이 70cm 너비 40cm 두께 20cm 아래로 줄여서 바닷가로부터 50m안쪽에 세우고, 비석이 차지하고 있는 넓이에 대하여 포항시에 임대료를 납부할 것.

 둘, 조난 기념비를 너희 나라로 가져가고, 비석을 세웠던 자리는 본디 모습으로 되돌려 놓을 것

우리는 일본국 낙수회의 조난 기념 행위에 대하여 방해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일본국 조난 기념이 우리의 주권을 깔보거나 침해하는 행위에 대하여서는 우리는 용납할 수 없다.
일본국 동경수산대학 낙수회는 우리의 요구 사항을 실천하여 양국간의 서로 돕는 관계가 되기를 바란다.
만약, 우리가 바라는 대로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실현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할 것을 약속한다

– 요구사항 불이행시 약속 –

쾌응환호 조난 기념비를 우리의 땅에서 우리의 마음대로 처리하겠다.

대한민국 민족ㅇㅇ ㅇㅇㅇ



2007-06-13

내일에 기억

 기억은 불안을 낳는다

기억은 하제를 만든다

말이 없으면 기억도 없다

새고나면 흔적없는 말을 쫓아
밤을 부여잡는 나날
욕심을 수그려 안위를 강요하고
안위에 실패한 시간은 불안을 짓눌리고

통증이 지배하지 않는 중추신경
짓눌린 불안에 쾌감하는가
한모금 한잔에 쾌감의 끝을 맡긴다

기억은 하제(내일)를 억지한다



200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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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한 흔적 수백여기

오월 한때로 산자 보다 못하게지만

잊혀진 자 보다 낫으리


창검에 도륙되고 화염에 쓸려간

긴긴세월 어디 수백이만 하겠는가

다시 천년을 이어갈 조국에


수백이 아닌 수만이

적 아닌 적이되어 아니 죽는다 누가 약속하랴

내 아닌 너는 제거대상이라

어리석은 믿음이 자루쥐고 있는 시간


이 산하에 뿌려질 것을

산자의 기림에 갈라질 것이라

조국이라 일컫는 이 땅에


그리고

아직도

다시 수천수만의 생피가

 

  2007. 6/3  _518묘역





2007-04-25

2007-04-16

코발트광산 학살관련_신문기사(매일신문)

[매일신문 2007/04/16 10:41]“경산 코발트학살 꼭 진실규명을” 현장서 위령제 열려

 “경산 코발트학살 꼭 진실규명을” 현장서 위령제 열려

15일 오후 경산 폐코발트광산 갱도 입구.전국에서 모인 50여 명의 퇴역군인들과 경산 코발트학살사건 희생자 유가족 등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005년 설립된 (가칭)평화재향군인회가 마련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민간인 학살 탐방’ 위령제가 열리고 있었다.김원웅 국회의원이 먼저 “애국의 대상이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후손에게 떳떳하기 위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이곳을 찾았다.”고 인사했다.

이어 57년 동안 한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다는 유가족들 증언이 이어졌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피학살자 경산유족회 이태준 공동회장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정당한 절차도 없이 학살당한 희생자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올바른 위령사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60년대 이곳에서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특종 보도, 전국적인 민간인 학살사건 진실 규명의 도화선을 당겼던 전 매일신문 기자 강창덕(80) 씨의 취재기와 이기형(90) 시인의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자 위령제에 바칩니다’라는 시 낭송이 이어지면서 장내는 숙연해졌다.

위령제를 마친 퇴역군인들은 수직굴 입구와 갱도 등 민간인 희생자 유골이 있는 현장들을 둘러보면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범죄행위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눈물을 훔쳤다. 평화재향군인회 표명렬 상임대표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학살당한 수많은 원귀가 지금도 구천을 헤매고 있고, ‘빨갱이’ 집안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시체도 찾지 못하고 큰소리로 통곡도 할 수 없었던 유가족들에게 국가와 역사와 정의라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한 뒤 “피학살자 및 그 가족들의 한을 풀어줘 진정한 용서와 화해로 승화시키기 위한 학살지 탐방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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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김진만기자 fact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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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04월 16일 –

매일신문 보도연맹 관련 2005~2007년 기사
[매일신문 2007-4.-11] 과거사委, 경산 코발트광산 집단학살 사전조사 착수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수감자, 민간인 등 3천5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산 평산동 폐코발트광산에서 10일 오후 국가차원의 조사가 시작됐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이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 매장지 조사 첫 대상지인 경산 폐코발트광산을……..
[매일신문 2007-01-31] ‘긴급조치 판결 ‘ 판사 실명공개
이외에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 등 7개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또는 불능 결정문 및 위원회 활동 현황이 담겨 있다. 2005년 12월1일 설립된 진실화해위는 4년 한시기구(2년 연장가능)로 부일장학회 헌납의혹사건, 80년 사북사건, 보도연맹사건, 익산역 미군폭격사건 등 1만859건의 진실규명 신청을 접수받았다. 연합뉴스….
[매일신문 2007-01-09]대구·경북지역 과거사 진상규명 신청 ‘봇물 ‘
들어온 A씨(74). 6·25 전쟁이 발발 한 1950년 7월 어느날, A씨의 아버지(당시 26세)는 달성군 가창에서 경찰·군·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됐다. 이른바 ‘보도연맹 집단 학살 사건 ‘의 희생자. 어느덧 고희를 넘긴 A씨는 지난해 정부의 과거사 정리 발표에 힘입어 56년만에 진실을 밝히기 위한 긴 여정에 올랐다. 어릴적………
[매일신문 2007-01-06] 경산 민간인 학살현장 실측조사
정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 ‘(위원장 송기인;이하 진실위)는 5일부터 3개월간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학살 현장인 경산 평산동 폐코발트광산 갱도에 대해 유해 발굴을 위한 실측조사를 벌인다. 이번 조사는 진실위의 용역의뢰로 서울대 국토지리연구소팀이 주도하며 갱도 내부의 구조, 안전성을 파악하고……..
[매일신문 2006-11-14] 진실화해委, 경산 코발트 광산사건 조사
과거사 정리를 위한 정부의 진실화해위원회는 14일부터 3일간 경산시 민주평통사무실에서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대표적 집단 민간인 학살사건인 경산 코발트광산(평산동 백자산) 사건에 대한 피해 신청인 조사를 벌인다.자료와 현장 조사를 마친 진실화해위 조사팀은 피해 신청자들의 증언 청취, 관련 참고인 조사 등을………
[매일신문 2006-10-17] “보도연맹사건 1천16건 전체 조사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직권 조사한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미 조사를 개시한 청원·진천지역 보도연맹, 청도 보도연맹, 청원 분터골 보도연맹 사건을 포함, 지금까지 접수된 보도연맹사건 1천16건을 직권 조사하기로 했다. 송기인 위원장은………
[매일신문 2006-09-15] “6ㆍ25 와중 민간인 1만7천명 학살 “
군과 경찰이 6ㆍ25 전쟁 기간과 그 직후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1만7천여명 이상을 학살했다는 공식 조사 결과가 나왔다. 또 북한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간첩단으로 발표됐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은 자생적 사회주의 단체였을 뿐 북한과 실제 연계는 없었다는 점도 재확인됐다. 경찰청………
[매일신문 2006-09-14] 진실 화해위 대구서 기자회견…조사활동 지원 요청
참가한 가운데 간담회를 갖고 진실화해위 활동에 대한 의견 수렴과 건의·애로사항을 청취했다.이날 진실화해위는 집단 희생사건과 관련 ▷문경 석달 ▷경산 코발트광산 ▷청도 보도연맹 사건 등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을 내려 당시 기록·자료를 분석하고 관련 참고인을 조사중이라고 밝혔다.이밖에도 대구·경북의………
[매일신문 2006-09-11][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7)50년 7월 보도연맹원 검거
보도연맹원에 대한 대구 일원의 대대적인 검거선풍은 1950년 7월의 둘째 주부터 시작되었다. 7월초부터 드리우기 시작한 죽음의 그림자는 음산하고 불길한 안개처럼 다가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마’하며 방심하고 있었다. 대구문학가동맹에 가입해 있던 아동문학가이자, 대륜중학교 교사였던 김홍섭(金洪燮)은……..
[매일신문 2006-09-04][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6)6.25 발발 직후의 대구모습
암략망동자, 북괴방송청취자 등 이적행위자는 엄중 처단한다는 경고가 나왔는데, 이는 이 시점에서 이적행위를 할 부류는 지하남로당원이 아닌 한, 보도연맹원 외엔 달리 없다는 예단에서 나온 조치였다. 결국 그동안의 보련조직이 치안당국의 위협과 강요에 의해 급조된 결과, 자칫 ‘트로이의 목마’가 될지 모른다는……..
[매일신문 2006-08-28][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5)이호우와 이문구의 기연
의외의 소득을 낳았다. 한국현대문인들 가운데 이문구의 경우처럼 비극적인 가족사도 흔치 않다.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 남로당 보령군책(保寧郡責)이 되었다가 보도연맹에 가입해 있던 이문구의 아버지는 6.25 후퇴 때 고향의 치안기관에 의해 처형되었다. 육사 2기로 입교했다가 위장병으로 자퇴, 집안일을 거들던……..
[매일신문 2006-08-21] 정영진의 대구이야기(34)…보도연맹 강제가맹
6·25로 인한 민족적 비극은 반세기를 넘긴 지금까지 많은 이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특히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맹했다가 변을 당한 ‘피학살자’ 유족들의 원한은 깊다. 일제 말엽의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을 모방한 ‘국민보도연맹’(약칭 ‘보도연맹’ 또는 ‘보련’)이 조직, 설립된 것은
[매일신문 2006-08-14][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3) ‘용두방천사건 ‘ 재판
편이 아니었다. 1년 뒤 북의 기습남침으로 나라가 위급하자, 좌익수들이 제일 먼저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핏발이 선 군경들에 의해 이들은 다른 좌익수며 보도연맹원들과 더불어 ‘가창골’의 원혼이 되고 말았다. 청렴강직하기로 소문났던 김용식 재판장은 퇴직 후 변호사로 지내던 1963년 5월18일, 67세를 일기로 대구…….
[매일신문 2006-07-03]경산 코발트 광산 희생자 위령제 열려
경산 코발트 광산 민간인 학살사건 희생자들의 합동위령제가 2일 경산 평산동 광산 현장에서 유족과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 회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경산시대책위 주최로 열린 이날 위령제에서 참석자들은 1950년 한국전쟁 직후에 군경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희생자들의……..
[매일신문 200-05-19] 진실화해위원회, 경산 코발트광산 현지조사 나서
과거사 정리를 위한 정부의 진실화해위원회(위원장 송기인)는 19, 20일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대표적 집단 민간인 학살사건인 경산 코발트광산(평산동 백자산) 사건에 대해 현지조사를 벌인다.진실화해위 조사팀은 19일 경산시에서 희생자 유족들을 만나 앞으로 2개월 동안 시민들의 진실규명 신청을 접수하고 생존자 증언…….
[매일신문 2006-04-14] 경찰청 과거사 진상위, 청도·경산 방문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종수)는 14일 6·25당시 ‘보도연맹원 사건 ‘과 관련, 민간인 학살 의혹이 제기된 청도 곰티재, 경산 코발트광산을 방문해 현장조사활동을 벌였다.위원회는 이날 오전 10시 청도경찰서 문서고에 보관된 자료 확인에 이어 청도읍과 매전면 경계지역인 곰티재(매전면 덕산리 용각산)를……
[매일신문 2006-03-11] 과거사위 100일…규명신청 2천건 돌파
사건이 전체의 77.5%(1천564건)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의 대부분은 ‘국민보도연맹’ 등에 연루된 것으로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과 ‘경기 고양 금정굴 사건’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고 과거사위는 전했다. 또 권위주의 정권에서 공권력에 의해 발생한 사망 등 공권력에 의한……..
[매일신문 2006-01-23] ‘국민보도연맹원’ 가족들의 50년 恨
살았다고 안도했지만 그것이 저승으로 가는 차표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전쟁이 터진 지 한달 쯤 흘렀을까,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일제시대 만들어졌다 폐광이 된 코발트광산(경산시 평산동 백자산)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집안에선 사촌형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번………
[매일신문 2006-01-23]“집단 학살의 진상 꼭 알고 싶어요 “
학살사건 증언에 나선 이태준(68) 씨. 경산시 용성면 외촌리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아직도 13세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사촌형이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간 뒤 곧 소식이 끊겼기 때문. 큰아버지가 소까지 팔아가며 돈을 마련, 구해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1950년 6·25전쟁이……..
[매일신문 2005-09-13] 코발트광산 2차 유골 수습 마무리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이 집단 학살, 매몰된 곳으로 알려진 경산시 평산동 폐 코발트 광산 주변에 대한 2차 유골 발굴작업에서 100여 명의 유골과 무기류 등을 수습하고 마무리됐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산 유족회(경산유족회)’는 “지난 달 16일부터 폐 코발트 광산 주변 백자산 대원골 2차 발굴조사에서……..
[매일신문 2005-09-01] 경산 민간인 학살 현장서 60~100명 유골 추가 발굴
경산시 평산동 폐코발트 광산 주변 대원골에서 실시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건 2차 발굴에서도 유골과 무기류들이 다수 수습돼 유족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 일대가 한국전쟁 최대의 민간인 학살 사건 현장으로 기록될지 주목된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산유족회(공동회장 이태준·이동칠)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매일신문 2005-09-01] 경산 폐코발트광산 최대 학살현장
경산시 평산동 폐코발트 광산 주변 대원골에서 실시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건 2차 발굴에서도 유골과 무기류들이 다수 수습돼 유족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 일대가 한국전쟁 최대의 민간인 학살 사건 현장으로 기록될지 주목된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산유족회(공동회장 이태준·이동칠)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매일신문 2005-08-18] 경산 민간인 학살발굴현장서 탄피 등 발굴
한국전쟁 직후 학살된 민간인이 집단 매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산시 평산동의 폐 코발트광산 부근 2차 유골 발굴 현장에서 20여구의 유골과 총알, 탄피가 발굴됐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산유족회(이하 경산유족회)와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유골 발굴팀은 16,17일 양일간의 발굴현장에서 나란히 놓인 5구의………
[매일신문 2005-08-18]경산민간인 학살 발굴…유골·탄피 발견
한국전쟁 직후 학살된 민간인이 집단 매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산시 평산동의 폐 코발트광산 부근 2차 유골 발굴 현장에서 20여구의 유골과 총알, 탄피가 발굴됐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산유족회(이하 경산유족회)와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유골 발굴팀은 16,17일 양일간의 발굴현장에서 나란히 놓인 5구의………
[매일신문 2005-08-17]한국전 양민 집단학살 경산 코발트 광산 2차 유골발굴 시작
한국전쟁 직후 학살된 양민이 집단 매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산시 평산동 폐 코발트광산(본지 2000년 1월 14일자 1·2·31면 보도)에 대한 2차 유골 발굴 작업이 16일 시작됐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경산유족회 ‘(이하 경산유족회, 공동회장 이태준·이동칠)는 지난 2001년 3월 제2수평굴에 이어 두 번째로….…..
[매일신문 2005-03-29] 경찰 과거사 진상규명위 ‘ 활동 돌입
우선순위는 서울대 깃발사건, 민청련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 자주대오 사건, 민청학련 사건, 남민전 사건, 46년 대구 민간인 사살 의혹 사건, 보도연맹원 학살 의혹 사건, 나주부대 사건, 진보의련 사건 순이다. 위원회는 또 진상규명 작업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3명의 민간위원을 추가로 위촉, 민간 대………

 

2007-04-15

코발트광산 학살(보도연맹 관련)현장 탐방

봄날 점심나절 차안은 약간 더운듯하나 에어콘을 켜기에는 추운 날씨다대구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지만 누구에게나 알려지지 않은 장소라 가는길을 물어 간 곳은 경산시에서 용성 방면으로 가다가 미래대학교를 지나 평산리 동네 뒷편 파티마재활요양원에 도착하니, 탐방행사를 주관하는 평화재향군인회 전세차량이 막 도착한 듯 삼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폐코발트탄광이라 해서 산속 외진 곳이라 생각했는데 탄광 갱도 입구는 파티마요양병원부지 한켠에 자칫 요양원 건물에 파묻힐 뻔하게 위치하고 있었다.(2010현재 광산 수직갱도 윗쪽 40m에 인터불고경산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갱도 입구에서 북쪽으로 내려다 뵈는 경산시 압량벌은 60년의 세월이 어지러운 지역개발이 말해 주는 듯하다
갱도 입구는 현수막에 가려 있었고 역사현장으로서 보존 또는 관리를 위한 시설이라고는 현수막 뒤 철문과 비탈진 산에 유족회 사무실로 쓰는 컨테이너 창고가 전부였다.

 굳게 닫힌 저 철문 안으로 57년전 3,500여명의 억울한 유골이 아직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에 아무리 생각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수 있는 일이 아닌데, 폐탄광 지역이 사유지(파티마 요양병원)라는 이유로 갱도 입구 위쪽과 왼쪽으로 10여미터 남겨 두고 요양병원 건물이 들어서 있었으며, 갱도 입구 아스팔트로 포장된 마당은 요양원 주차장이였다.
3,500여명의 이유 없는 죽음, 방치된 유골을 위로하는 것은 갱도 철문 위 벼랑에 핀 철쭉의 모습처럼 애달펐다

탐방지 행사는 평화재향군인회(대표 표명렬)를 주관으로 시작하여 6.25전후 민간인학살과 관련한 유족회(대표 이태준) 및 직관접적인 당사자와 학살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여러 분의 소개와 민족문제에 늘 열정을 가지는 김원웅 국회의원의 소개가 이어지고, 유족으로부터 증언을 듣는 순서로 이어졌다.

첫번째로 증언에 나선 분은 팔순에 이르는 할머니의 증언은 울분어린 목소리가 장내를 숙연하게 하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끌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설명되지 않는 죽음이 저 폐광안에 아직도 누구의 뼈골인지 알수 없는 상태로 널부러져 수습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학살의 진행형임을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 증언인으로 나선 60전후 되었을 아주머니 한 분의 증언 중에

같은 조건에 있는 친구에게 함께 나와 증언하자고 권하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내 아버지가 도둑놈 강도였다는 게 낫지 빨갱이는 싫다”는 말이였다고 했다.

그리고 유족회와 관련하여 지난 50여년 시간 가운데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승만정권이 물러간 4.19이후 잠시 이루어져 위령제까지 최초로 치루었으나, 다음해 5.16군사 구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후, 유족회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도리어 수감되어 15년, 10년형을 징역형을 받고, 최초로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언론에 보도하였던 전 대구매일신문기자(강창덕 80)였던 분은 7년여의 징역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나서 40여년 침묵 속에 묻힌 사건이 되고, 침묵의 결과는 피를 이은 자손이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기는 커녕 강도보다 더 못한 치욕으로 느끼도록 세뇌되었다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지의 학살 규모는 대구형무소 미결수감자 3,000여명과 경산,청도 인근의 보도연맹으로 임의 동행되어 학살된 500여명을 합쳐 3,500여명으로 학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보도연맹 학살지로는 대구 본리동 대구 가창 골짜기 청도 곰티재 등 수많은 곳에서 자행되었으며 경산코발트 폐광산에서 대규모로 자행 되었다

최초 취재 보도했던 기자 분도 당시 사건이 일어난지 10여년 밖에 되지 않아 인근 동네주민들로 부터 증언을 듣기에는 몹시 어려웠으나 가까스로 알아낸 건 학실이 진행되던 1950년 8월이던가 당시 10일 기간동안 하루 10여대 군용트럭이 민간인을 태우고 트럭 앞뒤 양 끝에 헌병 감시하에 코발트 광산 쪽으로 올라갔고 매일같이 산위에서 총성이 이어졌다고 했다.

학살의 방법은 광산의 수평갱도 안쪽 50미터 지점에 산위로 수직갱도가 뚫려 있는데, 수직갱도 위에서 줄을 세워두고 충살하며 쓰러져 수직갱도 아래로 떨어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떨어진 시신 위에 다시 확인 사살을 가하고 기름을 부어 넣어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유족회의 증언이 끝나고 방치된 유골 현장을 보기 위하여 갱도입구 철문을 열었다. 갱도는 지하수가 10~20센치 고여 있어, 유족회에서 준비한 장화를 참석한사람들 하나둘 갱내로 들어갔다. 갱내는 허리를 굽혀 간신히 들어설 수 있어으며, 갱도 중간에 유리상자에 수습한 유골 몇 점은 진열되어 있었고 수습되지 않은 유골의 위치는 안쪽으로 50미터 수직갱이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수직갱이 무너져 내린 돌덩이와 유골이 범벅이 되어 쌓여 있었다.



유골은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채 학살의 시간으로부터 멈춰 있다.

사건의 진상도 1년전(2006년 4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정부 공식기관으로서는 사건 후 56년만에 최초로 조사되었고, 아직 구체적인 발굴계획도 배상 계획도 아니 학살된 사람들 명단조차도 제대로 찾지 못한 상태이다.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유골은 과거사가 아니라 해결하지 않은 현재의 사건이며, 이와 같은 학살을 명백히 규명하고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여겨진다.

  역사의 과정에서 전쟁은 자의든 타의든 피할 수 없는 과정 이었으며, 앞으로도 전쟁이 없다고는 누구도 장담 못하 듯 또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와 같은 민간인 학살이 이보다 더할 것이라는 건, 동남아의 킬링필드, 보스니아 내전 등 동족상잔의 성격을 띤 전쟁의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여기 억울한 죽음의 명예회복은 대한민국의 역사정통성을 바로 세우고 대한민국 미래시대에 다시 혼란이 찾아 오더라도 흔들림이 없는 초석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절대 절명의 이 시대에 살아남의 후손의 사명이다

  유골이 뒤범벅되어 있는 돌무더기 위에 석회석 동굴도 아닌데도 맺혀 있는 종유석은
원혼의 뼈가 녹아 내려 종유석이 되고, 그 끝에 맺힌 물방울이 천년을 이어갈 눈물 되어
바라보는 나로 하여금 숙연해지도록 한다.
( 실제 일반 석회암층이 아닌 퇴적암층에는 석회석 종유석과 석순이 생기지 않는데, 여기 갱도 안에는 아래 그림과 같이 작은 종유석이 보이는 것은 수직갱도에 수없이 많이 쌓인 뼈가 지하수에 석회성분이 녹아 갱도 청전에 묻어 나와 종유석이 되었지 않나 여겨진다)


2007.04.15

2007-04-09

봄날

산도 들도 흙바람

봄가뭄 더 없는 따사한 햇살로
시간은 길게 뉘인다

어느때 어느 순간에 떠남이
닥칠지 모르는 시간시간이 오늘을 잇고

당신 가는 길이 서글픈 건가
나 가는 길이 서러운가



2007-03-19

아버지

 열네달 전 부푼 배가 쥐어짜는 통증에는 그나마 홀로 가눌 수 있었다 

기능성 소화장애…낫게할 수 있는 약은 없다 
그저 완화된 통증만을 기대하며 
지난 여름 워낙에 헐은 곳 많아 그러려니 한 종기 하나가 
가을 지나고 커져 피고름 쏫아내어 
불가능할 것 같은 전신마취 견디면 떼어낸 결과 
피부암이였다…잔존하는 건 방법없다 

설쇠고 더욱 떨어진 기력은 
마려워도 나오질 않는 벌써 일주일 
그 답답함을 아니 모른체 할 수 있으랴 
오랜 질병휴유로 형체 무너진 손발이  
다시금 부어 오르고 야윌대로 야윈 
살갖이 헐어 팔꿈치 뼈를 스치우는 통증에 
더 이상 일그러질 표정도 잃은 얼굴에 
홀로 지을수 있는 건  
가득 고인 눈물 뿐이런가 

보청기 볼륨 아무리 높혀도 알아 들을 수 있는 말 몇 안되고 
혼자만의 말씀만 되뇌인다 
나 죽거든…… 

골다공증과 뇌경색 휴유증을 있는 어머니의 간병은 
기도의 힘마져 지칠대로 지쳐가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축복인가… 

2007-01-16

보호자 대기실

동산의료원 4층 수술실 보호자 대기실

ㅇㅇㅇ 68 흉부외과…… 수술중
ㅇㅇㅇ 77 외과(혈관이식) 수술중
ㅇㅇㅇ 28 부인과……. 수술중
ㅇㅇㅇ 7 성형외과…… 수술중
ㅇㅇㅇ 34 신경외과…….회복중
모니터에 스크롤되는 글자가 들릴듯
삼십명 남짓 모여 있는 공간에 정적이 누른다

밤새 간병한 흔적이 역력한 부시시한 차림에
밀납같은 표정이 흐른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과 생사의 흐름은
모니터 뒤 벽넘어 불안한 상상에 두고
회복이라는 글자에 입술이 타도록 기다린다

한시간-두시간-세시간
벽넘어 호흡기계 돌아가듯
보호자 대기실 호흡 또한 계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