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4-24

일본수산실업전문학교 실습선 조난자에 대한 기념비 조사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일시 : 2006.04.23(일)
장소 :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

 

조사에 참여한 사람 : 정ㅇㅇ지부장, 이ㅇㅇ위원장, 서ㅇㅇ, 이ㅇㅇ, 정ㅇㅇ

 

1. 조사 동기

최근 동해안 한국의 배타적경제구역(EEZ)안에 일본이 수로탐사을 실시할 것을 국제수로기구(IHO)에 통보함에 따라 한국정부는 이를 침략적인 주권침해로서 강력히 항의하였고, 마땅한 협상은 아니나 협상을 통해 일단은 사태를 유보하는 선에서 진행과정은 멈춘 상태이다.

우리는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일본이 이와 유사한 사례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이미 100년전 일제의 대한제국을 병탄과정에 있어서도 우리의 영토를 해양조사(수로,수심 조사)를 한 사실이 있으며, 이 조사과정에서 조사선 좌초사건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그 희생자가 당시 한국정부의 등대시설 미비로 발생되었다는 적반하장의 책임을 물어 제국주의 침략사에 제일먼저 한다는 항로표시시설 등대를 하였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실습선이 좌초되었던 대보면 바닷가에 세워져있으며,

우리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에서 10여년전 한차례 조사한 바가 있어, 이번 기회에 보다 더 확실한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의 성격과 내용을 파악하여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다 더 확실한 침략적 행위임을 확인하고자 기념비가 세워진 곳을 찾았다.
2. 조난기념비가 세워진 위치는 10여년 전 한차례 조사한 사진이 있어 쉽게 위치를 가늠할 수 있어 찾았으나, 이전에 밭 가운데 위치하였던 것을 해안도로가 개설되면서 도로 옆 바다와 바로 인접한 위치에 조경시설까지 곁들여 설치 되어 있었다.

기념비가 있는 곳 전경


가. 기념비의 시설은 생각과는 달리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해안도로 개설로 인해 이전 설치하면서 큰비석은 폭이 한60cm정도의 정사각형 기둥형태의 거친 화강석으로 한국산이 아닌 재질로 보였으며 높이가 2.5m정도 되어 보이며 좌대를 화강석으로 새로 하여 포항시에서 안내 글귀까지 새겨 두었고 작은비석 또한 좌대를 새롭게 하여 설치해두는 등, 관리에 꽤 관심을 가진 모양새를 알 수 있었다. 

나. 우리 일행은 비석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하여 물분무기로 비석에 물을 적시어 사진 찰영을 하고 육안으로 확인될 수 있는 내용은 기록하였다.

1) 사각기둥비문

2) 작은비문(1971년 재건하면서 세운 비석)

구분비문 내용
앞쪽水産講習所快鷹丸遭難紀念碑
實  習  船
                  牧 朴 真 書
왼쪽ㅇㅇ 十五年九月九日建
發起者 當時 乘 組職員友生徒一同
오른쪽ㅇㅇ 四十年九月九日遭難 殉難者技師 吉永貴   八朗
生徒 池野仲     藏
同   久米川有   一
同   消谷育     三
앞쪽日本帝國統治三十六年暗黑時代 涇  祖國光復う喜
… .. ( 한자,일본어 토씨로 작성 내용은 뒤쪽 한글과 같음 )
뒷쪽 (한글 내용은 앞쪽과 같음)일본제국통치 삼육년의 암흑시대를 거쳐서 조국광복의 기쁨을맞이한 뒤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 되고 일본이 한국을 반도 유일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했고 또 배상에 응하였다는 것은 과거의 침략을 참회한 증표인 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친 자들 어찌 책망하리요 만방과 수교하고 인류평화에 공헌하고저 하는 우리 선조 전래의 홍익인간의 정신에 따라 구원을 초월한다는 것은 결코 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이곳에서 조난당한 일본인들은 침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 고로 육십만 한국교포가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그 옛날 망령들을 애도하는 한편 한일 양국민의 우의를 돈독하기 위하여 재일동포 한영춘씨가 사재를 내어 이 비를 재건한 것은 영구히 칭찬의 대상이 될 선행이며 미덕이 아니겠느냐 한씨의 간결한 뜻을 칭송하면서 이 글을 찬하노라 1971년 10월  일 ㅇㅇㅇ찬 김용구 서














다. 비문의 내용중 조난시일과 비석을 세운 시기를 알 수 있는 연호가 새겨진 부분이 파내었는지 시멘트로 덧칠하여져 있었고, 작은 비석에는 글귀를 찬(讚)한 사람의 이름이 파내어 지워져 있었다.

라. 해안도로를 개설하면서 포항시에서 현위치(구만리 491-2번지)비석을 이전설치하면서 비석 받침돌(좌대)에 안내 글귀와 안내 게시판을 설치하여 두었다.

 ㅇ 비석 받침돌 내용(2001.도로개설로 이전 설치시 새김)

實習船 「快鷹丸」遭難紀念碑 1907.7.7日本 水産講習所(現 東京水産大) 實習船 快鷹丸가 漁業實習을 위해 日本 品川中에서 迎日灣으로 出航하여 航海하던 중
1907. 9. 9. 颱風으로 大甫面 九萬里 앞바다 暗礁에 坐礁되어 技師1名 學生3名이 死亡하는 海難事故가 發生하여 死體는 事故海岸에서 火葬하고 木材紀念碑를 建立하였으나 毁損
1926.11. 水産講習所 11回 卒業生들이 發起人이 되어 九萬里 396-3番地에 現在의 碑石이 세워졌으나 1945.8.15일 光復과 同時 住民들이 反日感情으로 毁損 放置되어 오다가
1971.10. 在日同胞 韓永出씨가 費用을 負擔하고 親友인 당시 迎日郡 文化院長 朴一天의 諮問과 住民들의 協助로 九萬里 491-2番地에 再建되었다가
2001.11. 大甫~九萬간 海岸道路工事 敷地에 編入되어 現位置에 再建됨.

 ㅇ 안내 게시판 내용(도로개설 2001년 후 세움)
일본 수산강습소 실습선 쾌응환호(快鷹丸號 )조난 기념비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될 무렵 당시 1907년 9월 9일 일본수산강습소 실습선인 쾌응환호(137톤급)가 수산시험(해류. 어족분포 연해수심 등 조사)을 위하여 동해안에 내항하였다가 구만2리 앞 해중에서 좌초되어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조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일본의 압력으로 바위와 파도 및 조류가 심한 교석초 앞에 해상안전을 유인하는 수중등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26년 9월 9일 당시 그 배의 승무원과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이 곳에 「수산강습소실습선쾌응환조난기념비」를 세워 해마다 참배를 하여 왔으나 해방 후 현지 주민들이 이 비를 훼손하여 방치해 오다가 1971년 10월 한영출(韓永出)의 주선으로 방치되었던 비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마. 이번 조사에서 주로 확인된 바와 같이 작은비석 글귀와 비석받침돌 그리고 안내게시판 각각의 글귀가 약간의 다른 점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작은비석에서 ‘침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 고로’라고 새긴 것은 실습선의 조사행위가 오히려 침략행위와 관련이 있음을 반증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침략행위와 전혀 무관하다면 굳이 비문에 변명 같은 글귀를 새길 필요가 있었겠는가!

둘째, 원래비문(큰비석)에는 단지 실습선이라고 했을 뿐이며 두 번째 1971년 재건하면서 세운 작은 비석에는 조난사고라고만 언급되었고 ‘실습선과 항해목적’등은 전혀 기술되지 않았으며, 특히 받침에의 설명과 안내 게시판의 설명은 동일한 부분에서는 동일하게 설명함이 마땅한데 다음과 같이 다르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분용어사용항해 경로와 목적
큰비석교사(敎師)언급 없음
작은비석일본인언급 없음
받침돌기사(技師)어로실습을 위한 풍천중에서 영일만으로 항해
안내게시판교관수산시험(해류. 어족분포 연해수심 등 조사)을 위하여 동해안에 내항






셋째 받침돌에서는 다른 곳에는 언급이 없는 “태풍”을 언급함과 안내게시판에 ‘수중등대설치’등의 설명은 사건의 연혁에 해당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따로 인용되었으며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비석의 연호를 지워둔 것은 일본연호에 반일감정을 자극할 수 있음에 재건당시 재건을 주도한 측에서 일부러 그렇게 해 두었는 것 같고, 이는 마을 주민의 말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비석에 재건을 찬(讚)한 이름을 파내어진 것은 그 비문의 내용이 느끼는 바와 같이 졸렬함이 있어서 그런지 찬(讚)한 사람이 스스로 부정하고싶어서 그런 것인지 제 3자가 비난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비석글귀를 지우고 파내어진 상태로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만 보아도, 이 비석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리 일행은 비석이 세워진 자리를 떠나 이 당시 조난사건을 계기로 세웠다고 알려진(http://www.sunrisei.co.kr구사모) 호미곳 등대에 가서 관련자료를 찾아보고자 출발했다.

위 구사모 웹사이트에서 호미곳 등대설립과 관련하여 역사이야기로 아래와 같이 기술 되어 있었으며, 사망자 4명을 30명과 등대시설 건축연도 등이 잘못 기재된 내용도 있지만, 사건경과와  이후 현재까지에 대한 과정의 언급은 기록의 자료보다 구전의 자료를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상당히 신뢰할 만한 내용으로 보여진다.

일본 제국이 청.일 전쟁 승리 후 일본제국 수산실업 전문학교 실습선이 교사 및 생도 30여명을 태우고 해류 어군의 표류상황 한국연안 수심조사등을 목적 으로 동해안을 항해중에 영일만 장기갑 지금의 대보리 앞바다를 지나다가 암초에 부딪쳐 실습선이 조난을 당하여 일본학생 30여명 전원이 익사한 사고 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이 한국 정부의 연안 해운 시설의 미비로 발생한 사건이라하여 해운시설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발송함과 동시에 실습선의 조난사건의 책임을 한국정부에 뒤집어씌워 손해배상을 요구하는등 생트집을 함으로 한국정부는 부득이 한국 돈으로 일본인에게 등대시설을 청부시켜 1902년 3월 착공하여 1903년 12월에 준공하여 불을 켜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중략… 일본수산 실업전문 실습선 탑승원과 등대수의 순직비가 이 부근에 있었으나 해방후 철거되었다가 다시 한일외교가 트이고 한일국교가 정상화됨에 따라 철거 되었던 비를 이곳에 다시 세워 놓았다. (구룡포읍 웹사이트 자료)






출발하기 앞서 구만리 마을에 옛 아는 사람(지인)이 있어 잠시 만나는 과정에서 오늘 방문의 경위를 이야기 나누던 중, 현재도 일본인 해마다 조난기념비에 제사를 지내려 오며, 기념비를 관리하는 관리하는 명목으로 해마다 10만엔 정도 보내준다고 하였다.

등대 박물관에 도착하여 박물관 내부를 관람하면서 등대설립에 관한 연혁 또는 배경을 알아보고 살펴보니

등대박물관에는 다음과 같이 전시되어있었다.

등대박물관 전시물


그리고 바로 이웃한 등대 안내게시판엔 다음과 같이 표기되어 있었다.

호미곳 등대 게시판


우리는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석의 안내문과 등대박물관의 전시물에서는 조난사건 시점을 1907년 9월 9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등대 안내 게시판에는 1901년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년도가 6년 정도 차이 나는 것이 100여년 전에 일이라 착오로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1901년과 1907년은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1905년 을사늑약이 있었으므로, 사고시점이 1901년일 경우 을사늑약 이전으로 온전한 주권국가인 대한제국의 해양조사를 한다는 것은 주권국가에 대한 분명한 침략이며, 그 조사행위가 이후 을사늑약과 대한제국 병탄을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지만,

조사행위가 1907년일 경우, 이미 우리의 대외적인 모든 주권을 박탈하고 침략행위가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단순한 학술적 일 수도 있거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작업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연도이든 우리강토에 대한 해양조사활동을 벌인 것 자체가 부당한 행위로서 용납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위와 같이 비석문에서 지워진 연호를 추정하여 ‘명치’로 본다면 명치 40년은 1907년에 해당되어 몇몇 전시물에는 사고시점을 1907년으로 기재한 것으로 파악되나, 그럼 왜 등대 안내게시판에는 1901년으로 기재되었는가를 조사하고자 항로표지(등대)관리소장의 안내를 받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등대게시판과 박물관과 비석의 년도표시와 다른 점을 물으니 항로표지관리소장(ㅇㅇㅇ)의 이야기로는 항로표지에 기술되어있는 사력에 보면 조난사고 시점이 1901년이라고 알고 있고 그러한 자료를 기초로 등대게시판에 1901년이라고 명시되었다고 설명했다.

탐문할수록 조난사고 경위 시점은 더 많은 의혹을 가지게 하였다.

비석 있는 곳의 안내게시판의 1907년도 표시는 비석의 ㅇㅇ40년을 근거로 표시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등대게시판의 표시와 관리소장의 말에서 확신하는 1901년가 오히려 정황으로 봐서는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석있는 곳은 안내게시판과 좌대와 박물관 전시물의 1907년도는 2001년 비석을 이전 설치할 당시 파악한 자료로 비석의 글귀와 일본 측에 확인한 자료일 것이며

둘째, 등대게시판에 명시된 1901년도는 관리소장의 주장처럼 등대운영을 해오던 초창기부터 전하여 오는 이야기로 조난사고시점에 관한 인지가 더 오래 되었으며

셋째, 년도의 1901년이냐 1907년이냐의 경우에 따라 실습선의 조사행위가 침략행위 직접적인 과정이냐 침략으로 자행된 행위이냐로 구분되기 때문에 일본 수산실업전문학교에서 기념비를 세울 당시부터 이 사안을 염두에 두어 고의로 명치40년(1907년)으로 기술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고의가 있었기에 등대관리 역사에는 비석의 글귀와는 달리 광무5년(1901년)으로 전해오지 않았겠느냐 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조난사고 시점에 대한 명확한 확인을 하지 못한 채 점심식사를 마치고 등대시설물을 관람한 뒤 비석이 있는 마을의 주민을 만나러 다시 구만리를 찾았다.

마을에서 오래동앙 청년회장을 하였다는 분(배정현_현대수퍼)과 리장을 했던 분(윤두규)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로부터 사고시점에 대하여서는 이미 100년전의 일이라 목격자가 생존하여 있을리 없고 목격자로부터 전해 들은 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했지만 이 또한 비석을 처음 세운 것(1926)만 본 목격자 조차 1995년도에 91세로 별세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사고당시에 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71년도에 비석을 재건하는 과정과 현재까지 일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1) 1971년 비석이 세월 질 당시 수산청에서 마을주민들에게 공문으로 일본인들에게 적극 협조하라는 지시를 받아 그 당시에서 마을 주민들 간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찬반 논란이 있었으나 당시 군사정권하에서 관청이 지시하는 일에 이이를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와

2) 비석을 재건하고 난 뒤 그 관리를 두고 일본 동경수산대 측은 마을 주민을 회유하기 위하여 주민대표와 계약을 맺고 마을에 간이상수도 시설을 가설하는 등 주민지원사업을 해주었으며, 그 당시 비석관리비 명목으로 매년 10만엔을 마을 기금으로 보내준다고 하였다.

3) 기금의 지원 방법은 지원주체는 동경수산대학 측이지만 중간에 사회단체인 ‘로타리클럽’을 거쳐서 보내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뭔가 석연찮은 절차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3. 조사일정을 마치며 
이로서 조사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과 함께 다음에 추진해야할 일을 의논하였다.

가. 계속 남은 의문점
– 사고 시점이 2가지로 전해오는 각각의 근원은 어디에 두고 있으며
– 정확한 조난사고 시점은 언제인가

나. 앞으로 해야할 일들
사고시점에 경우가 달리하여도 포괄적인 침략행위로서 규정되므로 실습선의 조사행위에 대한 사실조사가 필요하므로
1) 비석의 이전설치를 하면서 받침돌 글귀와 안내게시판을 포항시에서 제작한 바 포항시에서 조난사고와 관련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으로 포항시에 자료요구 또는 정보공개청구를 하여 보다 자세한 내역을 알아 봐야 할 것이며
2) 실습선 조난기념비를 재건하고 이후 마을에 관리비를 송금하는 주체인 일본 동경수산대학교이므로 이 대학에서는 당시 조난사고와 관련하여 기록이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파악되므로 당시 실습선의 항해일지, 조사한 자료 등의 자료를 요청하여 확인해봐야 하며, 행여 일본 측에서 자료제공에 성실히 임하지 않을 경우, 일본측에서 그토록 소중히 여겨는 기념비를 파괴하겠다는 압력을 가하면 효과가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3) 이상의 자료조사와 확인이 끝나면 처음부터 침략적인 실습선으로 규정할 근거가 충분하나, 보다 더 정확한 실습선의 조사행위를 파악하여 이 사건을 규정하여만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이와 관련 자료를 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조사할 필요가 있음.
4) 자료조사와 확인이 끝나면 이에 따른 사건의 성격 규명을 공포하고 현 비석이 있는 곳에 관광안내게시판이 아니라. ‘침략 역사 현장’으로 사실규명과 설명을 곁들인 비석을 세우도록 포항시에 요청하고, 포항시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사회운동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음. 끝.

2006-03-28

흙먼지(黃沙2)

 도시의 한가운데

여간해선 맡을 수 없는 냄새가 아침나절 코끝에서 뭍어난다.

창밖 흙먼지에 뿌우옇게 흐려진 건물숲이다

테레비엔서 중금속이 다량 함유되었니 어쩌니 하지만
내 코끝에 느껴진 건
어린시절 이른 봄 강가엔 소꼴 뜯으러 갈제
들녘에서 강가에서 익히 느꼈던 흙내음이라

고비에서 출발하여 적어도 이천오백키로

태고의 전설같은
내 잊어 버린 시간을 안겨준다.



2006-03-18

돌아볼 수 없음이라

 얼음깨고 씻은 얼굴에 참바람 몰아치던 시간은 갔다

장대비 쏟아지는 밤에 취한 몸 가누지 못한 때는 버려졌다
연두빛 파르라니 추위에 떨던 새싹처럼
내 가녀린 시간은
모판에서 찢겨져야 잘 살 것 같아
이양기에 찢겨진 포기 처럼 찢어진 세월은
가실걷이에 이르를 시간인데

불러도
돌아볼 수 없음이라

내게 남겨진 건
얼마간의 남은 시간 후
흔적으로만 기억될 그루터기엔
내 가녀린 시간의 기억은 없을 것이라



2006-03-16

뒤안

 


2006-03-15

돌담

 


2006-03-13

2006-03-11

2006-02-20

불안

 잠들수 없는 시간

무엇할 까닭 없는 시간
남은 시간 정할 권한 우리에겐 없어
하루하루 헤아리는 시간

몰아쉬는 한쉼에
팔십년이 한 순간마냥 갔다 왔다
끝에 대한 불안은 끝없이 이어간다

겨우내 차가운 강가에 촉새풀 싱그러운 때도
장마비에 물고트다 흠뻑 젖은 때도
나락 수북히 실은 구루마 위에서 바라보던 서녘 노을진 때도
마른 흙덩이 먼지 흩날리는 보리밭 서래위에 나를 앉혀 두었던 때도
팔십년의 한켠에 묻어 있어 그리움이 되겠지

어찌 가실거나
어찌 보낼꺼나
나도 절반을 훌쩍 넘긴 때인데
아직 이 모양이니

아직은 건강하소서



2005-10-30

2005-09-20

2005-08-18

독도 연표

 지증왕 13년(512년)
  여름 6월 하슬라주 군주인 이찬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을 항복시켜 귀순하고 토산물로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다.

 고려
  – 태조 13년(930년)
  사신을 보내 토산품을 바친 기록

  – 현종9년(1018년) 11월
  동북 여진인 우산국을 칩입하여 농업을 작폐하게 되자 임금이 농기구를 내린다.
  1019년 여진인의 침략을 받고 피난해와 있던 울릉도인들을 울릉도로 돌려 보낸다
  * 1019년 대마도,이키섬에 여진인(50여척배 3,000명)들 침입하여 남자 44명, 승려 168명, 여자 59명 아이들 29명 살해하고 여자 239명 납치함.

 – 의종 13년(1509년)
   명주(지금의 강릉) 도감창 김유립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조사

 – 고종 30년(1243년)
  최이가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주민들을 이주시켜 정착케 하다가 중도에 그만둠
  국학학유인 권형윤과 급제 사정순등을 울릉도 안무사로 파견

  고종 33년(1246년) 5월 울릉도에서 대장경 판목을 구함

 조선
  태종 3년(1403년) 강원도의 무릉도(울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함(소개령)-공도정책 
  태종 7년(1407년) 대마도주 종정무(소다시게)가 일본인들을 울릉도에 이주하여 살게 해달라도 간청하나 거절함
  태종 16년(1416년) 김인우를 무릉등처 안부사로 파견하여 현지 실사 공도정책(섬을 비워두는 정책) 시작
  세종 7년(1425년) 김인우가 부역을 피하여 울릉도로 도망간 남여 20명을 잡아옴
  세종 20년(1438년) 울릉도민을 본토로 완전히 이주시키고 빈섬을으로 둠(공도정책 실시)
    – 3년에 1회 수토정책으로 울릉도를 파견 조사

 일본
  – 에도(江戶)시대
    1614년 덕천(도쿠가와)막후의 지시로 의죽도(이소다케시마_강원도와 경상도 경계에 있다하며)를 탐견(크기,지형 조사)하려고 동래부사에게 길 안내해달라고 서계(문서)를 가지고 옴.

 1693년 안용복 사건
1693년 여름 폭풍으로 울릉도 표류하니 울릉도에 대마도 왜인들인 진을 치고 있었으며, 왜인들은 울릉도를 죽도(다케시마)라고 불렀으며, 일본 산음도 호키슈(지금의 시마네현)에 속한다고 우겨 안용복을 오히려 국경을 침범하였다고 대마도로 잡아감서 대마도 태수와 면담하여 대마도 태수는 안용복을 반박에 안용복을 호키슈(시마네)태수에 보내어지고 호키슈 태수는 안용복의 설명에 수긍하여 막후 관백에게 보고하고 , 막후 관백은 안용복에게 동래부사에게 전할 서계를 준다. 안용복이 히젠번에 당도했을 때 히젠번주가 안용복의 서계를 뺏앗아 버리고, 대마도로 보낸어 대마도 왜구들은 안용복을 90일동안 감금시켜 놓고 동래부에 울릉도를 자기들 죽도라고 떼를 쓴다.
안용복은 감금상테서, 몰래 동래부에 감금사실을 알려 동래부사는 왜관에게 안용복을 풀려나도록 한다.
돌아온 안용복은 조정에서 울릉도 관리를 철저히 하기를 요구하려하나 동래부사는 조정에 보고조차하지 않아, 안용복을 직접 울산에서 13명의 사람을 모아  울릉도로 가서 왜인들을 쫓아낸다.
안용복은 왜인들을 쫓아 호키슈(시마네)까지 달려가 다시 호키슈 태수를 만나 대마도의 농간을 폭로하고  호키슈 태수가 에도에 안용복의 폭로사실을 전하려 하니, 대마도 태수가 자신의 징계를 두려워 간청하여 에도에 전하지는 못하고 대마도 태수로부터 ‘감히 다시는 대마도 사람들을 울릉도에 보내지 않겠다’는 편지를 동래부로 보내왔다.

  1696 에도막후 죽도(울릉도)에 일본어선 왕래를 금지함을 조선 조정에 알림

  한국
1700 삼척영장 장한상의 수토제 실시중 현재 독도에 대한 위치와 방향을 ‘울릉도사적’에 묘사함
1700 정상기의 ‘동국지도’에 독도를 우산국으로 위치와 거리를 정확히 표기함
1794년경부터 독도를 가지도(可支島)라고 부름(정조실록(正祖實錄))
1849년 프랑스 포경선(捕鯨船) 리앙쿠르호(Liancourt號)에 의하여 리앙쿠르암초(Liancourt Rocks)로 부름
1854년 러시아 군함이 독도의 서도를 올리부차(Olivoutza), 동도를 메넬라이(Menelai)라고 부름
1855년 영국 군함 호네스트호(Hornest號)에 의하여 측량되어 영국의 해도(海圖)에 호네스트암초로 기재

고종 18년(1881년) 울릉도 수토관원인 무단벌목하던 왜인 7명 적발
고종 19년(1982년) 이규원검찰사 울릉도 파견 조사-공도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엔 180여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음
고종 19년(1982년) 일본인 울릉도 무담칩임과 살림벌채 금지를 일본 외무성에 요청
1883년 김옥균을 동남제도개척사겸포경등자사로 임명하고 울릉도를 공식적으로 개척(공도정책 폐기)
1895년 수토정책 폐지하고 
전임도장제 실시
1898년 울릉도를 지방관제로 편입
1899년 12월 내부시찰관 
우용정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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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10월 25일(광무4년) 칙령41호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
군청위치는 태하동으로 관할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을릉도 동북쪽 본섬과 2.4KM떨어진 섬),
석도(石島; 지금의 독도)를 관할
함.

  勅令 (칙령)

勅令第四一號 (칙령 제41호)

鬱陵島를 鬱島로 改稱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한 件 (울릉도를 울도로 이름을 바꾸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

第一條 鬱陵島를 鬱島라 改稱하야 江原道에 附屬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하야 官制中에 編入하고 郡等은 五等으로 할事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소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중에 편입하고 관등은 5등으로 할 일)

第二條 郡廳位置는 台霞洞으로 定하고 區域은 鬱陵全島와 竹島石島를 管轄할 事
(제2조  군청위치는 대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석도를 관할할 일)

第三條 開國五百四年八月十六日官報中 官廳事項欄內 鬱陵島以下十九字를 刪去하고 開國 五百五年 勅令第三十六號 第五條 江原道二十六郡의 六字는 七字로 改正하고 安峽郡下에 鬱島郡三字를 添入할 事
(제3조 개국504년8월16일 관보중 관청사항란에 울릉도 이하 19자를 삭제하고, 개국505년 칙령 제36호 제5조 강원도26군의 ‘6’자는 ‘7’자로 개정하고 안협군밑에 ‘울도군’ 3자를 추가할 일.)

第四條 經費는 五等郡으로 磨鍊하되 現今間인즉 吏額이 未備하고 庶事草創하기로 該島收稅中으로 姑先磨鍊할 事
(제4조  경비는 5등군으로 마련하되 현재 이액이 미비하고 서사초창이므로, 이 섬의 세금에서 먼저 마련할 일 )

第五條 未盡한 諸條는 本島開拓을 隨하야 次第磨鍊할 事
(제5조   미진한 여러 조항은 이 섬을 개척하면서 차차 다음에 마련할 일)

附則 (부칙)
第六條 本令은 頒布日로부터 施行할 事
(제6조  본 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일)

光武四年十月二十五日 (광무4년 10월25일)

御押 御璽 奉 (어압 어새 봉)

勅 議政府議政臨時署理贊政內部大臣 李乾夏(칙 의정부의정임시서리찬정내부대신 이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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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까지는 독도의 인식보다는 울릉도에 관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독도가 울릉도의 딸린 섬이라고 생각하는 건 한국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며,
일본의 입장에서는 울릉도와 별개의 섬으로 인식하거나 오히려 일본에 딸린섬으로 인식하는 견해차이가 있어

울릉도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과 증거는 독도의 직접적인 영유권 주장에는 설득력이 약하다도 본다.

 

독도에 관한 영유권의 확고 부동한 증거는 1900년 대한제국의 칙령에 의한 관할한 증거이며

이 당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침략을 당하는 과정에서 침략자가 점령하여 자신의 소유로 하였기에

독도를 자신들의 영유권으로 보는 것은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을 뿐더러 언제든 기회가 되면 다시 침략을 시작하겠다는 

의지로 보아야 한다.

일본은 비록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였고 그 댓가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나, 거기에서도 독도는 명시하지 않음으로서

한반도의 지배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이다.

만일, 일본이 한국에 의하여 패망하여 전쟁 배상을 한국이라는 당사자와 했더라면 이러한 분쟁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100여년전 한국을 침략하고 점령하였으나, 점령지의 주된세력의 저항에 의하여 패망한 것이 아니며,

점령지와는 상관없는 연합군의 강요에 의한 점령지의 관할 포기이지, 점령지의 주된세력에게 점령지를 돌려준 적이 없다.

 

그리나, 실질적인 국가의 실체로 오늘에 이르는 우리는 우리의 영토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

국제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누락된 독도의 관할권 표시에서 출발된다.

분쟁의 씨앗은 이 조약에 있으며,

이 조약을 국제적인 조약으로 인정을 하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가슴아픈 조약이라 하겠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의 관할권을 논하면서 한반도의 주된세력은 논의에 참여되지 않은 조약….

강대국들의 전리품 분배와 같은 조약에 우리는 그 전리품으로 취급된 조약이다.

 

독도문제의 영원한 종결을 위하여서는

일본이 전쟁의 승자인 연합국과 맺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별개로 하고

한국과 일본의 영토 관할에 대한 명확한 조약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고 본다.

 

1904.8.23. – 조일의정서에 의거 – 독도에 – 일본 해군부대 설치 ( ★ 해양침략의 첫발)
1905,2, 일본은 독도에 망루와 통신시설 설치
1905.2.22 시마네현 량고도(독도)영토 편입 결정(시마네현 고시 제 40호)
1904.9.29 나카이(일본인) – 량고도 영토편입 병이 대하원(리앙쿠르(독도)도 영토편입 후 임대해 줄 것 청원) 내무대신, 외무대신, 농상무대신 앞으로 제출
1905.1.10 일본 내무성 – 무인도의 소속에 관한 건을 내각에 상정
1905.1.28 일본각의-내무부의 위 안건을 결의
1905.2.15 일본 내무성 제 87호 각의의 결정을 관내 즉 시마네현에 고시하도록 시마네현 지사에게 지시
1905.2.22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로 발표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 북위 37도 9분 30초, 동위 131도 55분 은지도(오키시마)로부터 서북 85리에 있는 섬을 타케시마라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은기도사 소관으로 정한다. 명치 38년 2월 22일”
1905.5.3 시마네현지 제 90호 – 은지도청에 대하여 죽도 면적을 조사보고할 것을 지시.
1905.5.17 은기도사 -시마네현 소영무길에게 죽도면적 “23정 3반 3묘보”를 보고.
1906.4.30 일본의 “죽도 어렵합자 회사”란 회사가 일본 시마네현 지사에 독도 임대를 신청함.
1906.7.2 일본 시마네현에서 “죽도 어렵합자 회사”에 임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독도’라는 이름은 처음 사용됨(현재까지 발견된 문헌 기록중)
1907년 경삼남도 울도군으로 편제
1910년 한국수산지 제1호 제1편에 한국령으로 표기 ( 한국수산지는 일본인이 주도하여 작성된 문서임)
1914년(일제)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독도를 경상북도에 편입되었고
1914년 경상북도 울도군으로 편제  (일제 강점기의 일본의 통치기간에도 한국 지방행정구역에 편제한 것은 한반도에 딸린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임)

1945. 포츠담 언 제 8항에서 일본국 주권이 미치는 영역을 명시하고,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SCAPIN 677호 3항에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영도에서 제외한 섬으로 명기
1946.6.22 SCAPIN 1033호로 지정해 독도와 독도근해 12해리 이내에 일본 선박 접근 급지시킴
1948.6.8(화)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삼은 미공군기(오키나와발 B29)에 의해 울릉도 어민 사상자 발생 선박 30~80척 침몰, 어민 30~100여명 사망
1951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중국,대만,남한,북한은 회담에 초청되지 않음 에서 일본측 고문인 ‘시볼드’에 의해 제6차초안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명기 요구하고
미국 국부무는 독도를 명기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5차초안까지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들은 독도를 한국령 명기하는 걸 찬성하였으나
6차 초안 미국의 독도를 일본령으로 명시한 것은 뉴질랜드,영국이 미국의 수정안에 동의하지 않아 최종 결의안에는 독도를 일본령도 한국령도 명기하지 않고 조약이 체결되었다.

  1951.6.8 독도의 서도 자갈밭에 경상북도지사와 울릉도민이 1948년 희생자 위령비를 세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들에 의해 쇠망치로 부수어 물속에 던져짐.

1952.7.6 연합군 총사령부 SCAPIN 2160호 지령으로 독도를 미군 해상폭격연습지로 지정
1952.9.15. 미군기 독도에 폭탄 4발 투하(인명피해 없음)
1952년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사 독도를 기점으로 평화선을 선포함
1953. 4. 27 울릉도 주민(33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대장 : 홍순칠)
1953. 6.25,27,28 3차례 일본인들이 독도에 상륙하여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영토 표시
1953. 7.8 한국 국회에서 일본인 독도 침범에 대한 결의문 채택, 경상북도 의회도 항의결의서 채택
1953.9.17 일본수산시험청 소속 선박 1척이 독도 침입
1954.5.18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표시판 철거하고 바위면에 ‘한국령’새김_작업중 일본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독도의 서도 북서족으로 접근하다가 한국 해안경찰대로부터 10여분 총격을을 받고 물러감.
1954년 항로표지(등대)설치. 같은해 8월 1일 점화개시 각국에 통보
1954.9.15 독도 우표 3종 발행
1956년 4월8일 국립경찰의 경비임무 독도의용수비대로부터 인수 결정
1980년 최종덕 독도 전입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와 주변 12해리가 한일간 ‘중간수역’ 안에 위치하게 됨
1999년 문화재청 고시 제 1999-1호(6.1)로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관리지침 고시
1999년 문화재청 고시 제 1999-25호(12.10)로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 천연보호구역’으로 변경
2000년 독도 주소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37번지로 변경
2003년 독도에 우편번호(799-805) 부여
2005년 3월 독도관리기준안(기존 독도관리지침 폐지) 및 독도(동도)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