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10

끈적이는

 달걀 힌자위

개구리 알
끈적이는 느낌
고온다습 칠월의 공간
끈적이여 닿음은
몹시도 싫어라 하지만
어쩌랴
이 시간이 생존의 형식인 걸
차라리 난 좋다
따스한 양수의 기억처럼
니게로 함몰하여
난 끈적이는 그 무엇이 될꺼라

2008-07-08

미소

하고 싶은 건
신에게 미소 짓는 일
지치면 쉬고 싶고
슬프면 울고 싶으면
신은 내게 무슨 재미있어
나하고 대화하려 할까
신에게 미소 짓는 일
나 이대로의 모습으로
신은 함께 기쁠 것이라
신은 나를 노예로 세우지 않았기에
나는 나의 주인으로 살고자 이기에
오늘을 저항하며 내일을 바라며
신은 나와 더불어 기뻐할 것이라
지쳐 쓰러지고 한없이 쳐져 슬픔에 젖는 건
혼자일 수 있는 자유 일꺼라
간당간당한 목숨
시간 위에 선택은 책임져야 할 의지이기에
나 신에게는 미소 지을 일만 남는다

2008-07-01

운강 이강년선생 유허지 답사


운강 이강년선생 유허지 답사

 날짜 : 2008.06.28.09:00~19:00
참석 : 회원 4명(정연○,리세○,노정○,정승○)

대한제국 시기부터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항일독립 운동한 선조들의 유허지를 답사하는 것은 친일의 아픈 상처의 역사의 반면에 민족 자존심을 드높였던 항일 애국지사들을 찾아 기리는 행위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민족과 역사의 정체성을 다시금 새기는 계기가 되고, 역사를  이어갈 자손들에게 민족과 역사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산교육을 위한 방편을 모색하고자, 올해는 사전 답사형식으로 회원들 몇 명으로도 우선 답사를 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2009년도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있는 테마형 답사를 해보려는 계획이다.

지난 4월에 왕산 허위선생의 묘소와 나신 곳을 답사하고 난 뒤 짝수 달마다 항일 의병활동으로 영남지방에 익히 알려진 인물을 더듬어 보는 계획을 세우고, 이번에 문경 가은에서 나셔서 대한제국 시기에 소백산맥 일대에서 의병활동으로 그 공이 높은 운강 이강녕선생의 나신 곳과 기념관 그리고 묘소를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때마다 시간을 낼 수 없는 회원님들의 바쁜 생계가 우선인지라 모일 수 있는 분들만이라도 모여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6월 28일 이날 함께한 분들은 나를 포함하여 4명으로 출발하였다.

문경 가은까지는 경북지역이지만 그리 녹녹한 거리가 아니었다. 고속도로를 통하여 문경새재 나들목을 빠져나와 가은읍 쪽으로 향했다. 가은읍에서 우선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이 있는 완장리를 찾아가는데, 주변에 석탄박물과 연개소문 찰영장 등의 관광안내를 위한 이정표는 곳곳에 보였지만, 어디에도 운강 선생의 기념관을 알려주는 이정표는 없었다

가는 길은 용추계곡방향이라는 걸 지도로 확인되어 용추계곡 가는 길로 중간 중간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도착하니, 출발할 때 조금씩 뿌리던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하였고 본관 전시관에 왼편 의충사 사당에 먼저 참배를 하고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전시물은 운강선생의 개인 유품 몇 점과 대부분 항일독립운동하였던 분들이 풍찬노숙의 삶이므로 전해오는 관련 유품이 그리 많지 않았고 관련 모형전시물과 설명 자료가 전부였지만, 이나마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 다행으로 여겨졌다. 전시관 전체가 지은 지 몇 해 되지 않아 깨끗하였으나, 올 때부터 이정표 하나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로 그리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임이 역력하였다.

 전시관을 들러보면서 관리사무소에는 사람이 없고 때마침 지역 언론인 ‘내사랑 문경 인터넷신문’의 취재가 있어 그 사람들과 몇 마디 화제로 삼은 것은 전시관의 소화기가 제조일이 2001년도만 찍혀있고 유효기간이 5년인데 그 중간에 단 한번도 충약한 기록이 없어 충약문제와 전시관 앞에 지역민들의 모금으로 세웠다는 비석과 함께 있는 깃발계양대에 태극기와 문경시 깃발 이외에 민간단체인 새마을 깃발이 나란히 걸려 있길래 뭔가 어울지 않지 않는가 하고 이를 언론의 논제를 삼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거론하니,

충약하지 않은 소화기

 

새마을깃발+태극기+문경시깃발

 



의외로 문경인터넷신문 관계자는 마치 자신들이 관리의 주체가 되고 자신들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인 양 즉시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새마을 깃발은 마을 청년회에서 자발적으로 걸어 둔 것이라고 해명(?)하였고, 소화기 충약도 사용에 지장이 없다고 변명(?)을 하여, 묻는 내가 어색한 처지가 되어 그냥 그러네요 하고 돌아서서 기념관에서 한 오백여미터 위쪽에 있는 운강선생의 나신곳을 살펴보러 출발했다. 안내현판에 생가지터로 되어 있고 안내 비석에는 ‘나신곳’으로 표기되어 있어, 우리의 문화적 표현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익숙한 ‘생가’, ‘생가지’ 이러한 표기보다는 ‘나신곳’,‘나신집‘ 이 표현이 입에 익지 않아도 앞으로 자주 써야할 것 같다. 운강선생의 나신 집은 자물통으로 굳게 닫혀 있어 주차장에 딸린 매점에 부탁하니 관리하시는 분에게 연락하여 금방 달려와 열어주어 볼 수 있었으며, 나신집 또한 기념과과 마찬가지로 복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갈한 상태였다.

태어나신 집(안채)
태어나신집(별채)

시간이 오후 한시 무렵 되었지만 우리 일행은 묘소 참배를 하고 곧바로 대구로 향하면 칠곡 왜관 부근에 있는 이조명가를 운영하시는 회원님의 집을 방문할 것을 계획했기 때문에 점심을 조금 늦추어 이조명가 회원님 집에 가서 할 것을 계획하고 운강 이강년 선생의 묘소를 찾아 길을 재촉했다.

묘소는 나신 곳과는 다른 행정구역인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에 있다는 정보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묘소 위치는 기념관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얻을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가은읍으로 다시 나와 농암면을 거쳐 상주시 화북면으로 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 한참 헤매다가 화북면에 접어 들어 입석리를 찾았으나, 기념과 조차 이정표 없는 마당에 묘소의 안내판은 있을 리 만무하여, 입석리에 위치에 백악산흥부네 식당에 들러 물으니 잘 알지 못하였지만 친절하게도 입석1리 리장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어 위치를 물을 수 있었다. 리장이 알려 준 대로 늘고개를 넘기전 오른쪽으로 나 있는 산길을 접어들었는데 막힌 도로로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나와 백두대간이라는 커다란 돌비석이 있는 고갯길을 넘어 위치한 마을을 살펴 보아도 리장이 알려준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늘고개 백두대간 표석]

[청화산휴게소]


[백악산흥부네식당]

[진입로 공사현장]


다시 고개를 넘어가서 자세히 보니 늘고갯길 일대에 많은 불루베리 농장이 있는 가공공장 옆으로 비포장 산길이 있어 들어서니 배수로공사와 더불어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진행 중인 길이여서 리장에세 들은 바와 같아 길의 끝까지 가니, 농가 한 채가 있고 길은 끊어져 있었다. 오후들어 빗줄기는 더 거세게 내리고 비포장 도로 바닥은 진흙구덩이로 답사의 길은 탐사의 길이 되고 있었다.

길은 보이질 않고 잘못 들어선 것일까 하여 다시 돌아 나와 고갯길 마루에 있는 불루베리 판매장과 휴게식당을 겸한 청화산 농원에 들어가 식당주인에게 길을 물으니 조금전 들어선 길은 맞는데, 공사중이라 길을 끊어 놓았다고 했다. 끝어진 길을 건너 올라가면 자리 좋은 곳에 운강이강년선생의 묘소가 있다하여 다시 진흙길을 들어가서 차를 세워두고 배수로공사 때문에 끊어 놓은 산길을 우산을 받쳐 들고 올라서니 굴삭기 장비가 올라간 흔적으로 길이 이어져 있어 따라올라 능선까지 올라갔지만 이름모를 묘지만 몇기 보일뿐 찾을 수 없었다. 진흙과 비에 젖은 풀섶에 신발과 옷가지는 다 젖었고, 운강이강년선생의 묘소는 쉽게 찾을 수 가 없었다. 능선 주변을 돌아보아도 숲이 우거진 곳에서 쉽게 눈에 뜨이질 않아 아마도 길을 잘못 들었을 것 같아 다시 내려오면서 주위를 찬찬히 훑어보니 배수로 공사로 끊어놓은 지점에서 바로 왼쪽 수풀 속에 통나무로 계단을 한 흔적이 있어 그 길을 따라 삼십여 미터 올라가니 그렇게도 찾던 ‘도창의대장운강이선생지묘(都倡義大將雲岡李先生之墓)’’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무릅쓰고 준비해간 법주와 오징어를 올려두고 참배하였다. 묘소관리는 1987년부터 화북면명륜회에서 자원봉사로 관리되어 오고 있다고 인터넷(내사랑문경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운강이강년 생묘소의 정화사업추진위워회가 구성되어 묘소를 성역화하는 공사가 진행중에 있어 우리가 찾아 올라갈 때 배수로와 도로확장공사의 진흙길이였던 것이다. 아마도 내년에 다시 찾아 올 때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참배를 마치고 서둘러 산을 내려와도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어, 출발할 때 가기로 약속할 땐 오후 2시에서 3시이면 갈 수 있다고 여겼던 칠곡군의 이조명가에 이르기는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다. 더군다나 일행 중에 저녁시간에 생업과 관련하여 중요한 약속이 있는 터라, 더더욱 여유가 없게 되어 가기로 했던 칠곡군 회원님 집엔 취소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 급하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편하게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식사를 때우고 서둘러 대구로 돌아와도 이미 저녁 7시가 되어가고 있었다.운강이강년선생의 기념사업은 그나마 지방자치단체의 지역관광사업과 관련하여 최근년도에 들어 새로 조성되어 관리되고 있었지만, 석탄박물관과 연개소문 찰영장 이라든지 용추계곡 등의 관광자원에 비하면 나신곳과 기념관이 가은읍에서도 한참 들어간 골짜기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이정표 하나 제대로 없고 더군다나 묘소는 그 곳에 살면서 관심 있는 사람 몇 명만 알고 있을 정도로 우리의 관심 밖에 존재하고 있음을 새삼 느낄 때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운강 이강년선생 묘소]


[참배를 위한 준비]

[참배_(카메라 타이머작동)]


[ 묘소에서 바라본 청화산 전경]


2008.07.01.한들 쓰다


 

>> 운강 이강녕선생 기념관에 관련한 민원 제기 및 답변 내용(2008.07.01)

 

 

[운강 이강년 의병장 유허지 답사 후

문경시장에게 바란다’민원게시판에 올린 내용입니다
—————————————————————————-
지난 6월 28일 비오는 가운데도 불구하고 문경시 가은에 있는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조성된지 몇해 되지 않은 기념관이라서 그런지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어 보기에 좋았습니다.
기념관에 들리어어 운강 이강년선생의 영전에 참배하고 , 묘소는 상주시 화북면에 있어 비오는 산중에서 선생의 묘소를 물어물어 찾아 보고난 뒤
운강 기념사업을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한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이렇게 글을 남김니다.
먼저 기념관을 들러 볼때
1. 기념관을 축조한 나무 기둥의 많은 부분에 좀이 먹어 들어가고 있어 지금 바로 방제작업을 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막대한 비용이 들것으로 보여지며,
2. 유효기간이 5년인 소화기의 제조년월일 2001년도로 되어 있고 단 한번도 충약된 흔적이 없어 방화관리에 조금 소홀하여 보였으며,
3. 정문 왼쪽편에 국기 계양대에 나란히 걸려있는 민간단체의 깃발인 새마을기는 정녕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하고는 무슨 의미가 있는 지 알길이 없더군요~
그리고 또 한가지
기념관이 가은에 있다는 것만 알고 가은읍까지 찾아 왔으나, 석탁박물관과 연개소문 찰영장 이정표는 한쪽 눈을 감고 찾을 수 정도로 자세한 이정표가 되어 있는데
4. 어찌하여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 가는 길은 이정표 하나 없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덧붙여 기념관에서 운강 이강년 선생의 묘소에 대한 안내지도를 제공되었더라면 그날 비오는 가운데 산길을 헤매이지은 않았을 걸 하고 아쉬워해 해 봅니다.
아무쪼록 기념관 관리에 애쓰시는데 이렇게 불편한 글을 올리게 되어 송구스러운 마음 금치 못하지만 운강 이강연선생의 뜻을 기리는 한사람으로서 느끼는 마음을 여쭈어 봅니다.
이에 대하여 문경시의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이 글을 문경시청에 올리고 난뒤 몇 칠후 문경석탄박물관 소속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석탄박물관에서 전화 올일 없다하니, 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도 석탄박물관에서 관리한다고
하더군요, 전화로 몇가지 의논하고, 다음 예산편성시 근거가 되도록 글을 올렸다 설명하고
답글을 편하게 달아 달라고 했고, 답글은 몇칠 후 아래와 같이 달렸습니다.
———————————————————————
제 목 [답변]운강 이강년선생 기념관을 다녀와서

○ 우리시를 방문해 주시고,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선생님께서 찾아주신 운강 이강년 기념관은 지난 2002년 4월에 개관하여 지금까지 지역민과 외부  관광객, 청소년 등 수많은 관람객이 다녀간 호국의 성지입니다. 문경시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운강  이강년 선생을 현양하기 위하여 선생의 생가지를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하고, 생가터에 3동의 생가를 복원 하였습니다. 이렇게 진행된 현양 사업은 지역민과 보훈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운강 이강년 기념관을 건립하게 된 것입니다.
정 선생님께서 방문하신 후 지적하신 문제점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기념관을 축조한 나무 기둥의 많은 부분에 좀이 먹어 들어가고 있어 지금 바로 방제작업을 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막대한 비용이 들것으로 보여지며
☞  나무기둥에 좀이 생기는 원인은 “황슭감탕벌”이라는 곤충이 드나들면서 생긴 공간으로서, 선생님의  의견처럼 방제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 보수하는데 큰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빠른시일내에 전문가의 현장조사결과를 토대로 방제작업을 실시한 후 관리에 철저를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2. 유효기간이 5년인 소화기의 제조년월일 2001년도로 되어 있고 단 한번도 충약된 흔적이 없어 방화관리에 조금 소홀하여 보였으며,
☞  소화기 관리는 문경시와 문경소방서에서 지속적으로 매년 2~3회 주기적인 정기점검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정기 및 수시점검을 통해 방화관리에 철저를 기하겠습니다.

3. 정문 왼쪽편에 국기 게양대에 나란히 걸려있는 민간단체의 깃발인 새마을기는 정녕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하고는 무슨 의미가 있는 지 알길이 없더군요~
☞  기념관 앞에 설치된 국기게양대는 운강선생 휘하 부대원들의 후손과, 지역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합하여 설치하였으며,  당시 국기게양대 건립과 관련한 기념비가 기념관 맞은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운강 이강년 선생의 휘하 부대원들 후손의 뜻과 지역민의 뜻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 기념관이 가은에 있다는 것만 알고 가은읍까지 찾아 왔으나, 석탄박물관과 연개소문 찰영장 이정표는 한쪽 눈을 감고 찾을 수 정도로 자세한 이정표가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운강 이강년선생의 기념관 가는 길은 이정표 하나 없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덧붙여 기념관에서 운강 이강년 선생의 묘소에 대한 안내지도를 제공되었더라면 그날 비오는 가운데 산길을 헤메이지는 않았을 걸 하고 아쉬워해 해 봅니다.
☞  운강 이강년 선생의 기념관을 찾아오시는데 이정표가 없어 불편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이정표를 설치하기 위하여 현재 설치장소 조사 등 추진중에 있으며  또한, 운강  이강년 선생의 묘소까지 찾아가는 길 안내는 기념관 입구에 위치도와 사진을 게재하여 관람객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문경관광에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리며,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내용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www.gbmg.go.kr/open_content/mayor/wish/index.asp?command=view&page=1&idx=738&cate=&query=

 

 





















2008-06-23

다시 없어

 어디로 갔을까

태고의 햇살을 머금었고
영원을 노래하던 때여

어디로 갔을까
바라만 보아도 목매이고
함께만으로도 꿈결같은 때여

내 눈이 멀었나
마지막 바램의 모습이였다면
참으로 간단할 일

간단한 일 다시 없을 줄 알았듯
바램의 마지막 모습에는
내 찾는 햇살은 없고
내 가졌던 꿈결도 있지 않아
어디에 간 것일까

내 안에 갇힌 햇살은 달의 뒷면 되고
꿈은 돌아올 수 없는 탐사선되어
여기 내게 감각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세월에 드리운
여전히 지탱해야 할 책임 뿐

간 곳이 어딘지 몰라도
가버린 때에 끌어 잡는 부질함이라
찾은 들 이미 내 눈이 멀고
죽은 서로의 영혼만이 허망하니
내 무슨 까닭으로 찾을까

이제는
살아서도 다시 없을 그림자를
더는 찾지 않으려니
바램의 마지막 모습은
나의 힘겨운 현실로 놓인다


2008-06-18

자유에로

 불빛을 내리고

아스팔트 위로 물안개 올라
촉촉한 어둠이 더하는 들판에
머물지 못하는 시간이 흐른다

젖은 흙에 묻어나는
그림자는 물안개에 지워진다

내 것도 너의 것도 아닌
어둡게 젖은 들녘 하늘에 둔
맹세는 나의 발목을 잡는다

아쉬움도 부질없다
안타까움도 부질없다
그저 편안하냐 물어
너 편함은 너의 몫
나 편함은 나 바램일 뿐

나 편함은
부질없는 맹세 떨쳐내고
젖은 흙에 젖은 발로 들판을 가로질러
어둡고 비 오는 밤하늘에 홀로 선 자유라


2008-06-17

원천

시간의 앞뒤는 사람의 짓

존재하지 않았던 앞은
존재하지 않을 뒤를 근심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지배한다

이 순간
존재하지 않음과 등가를 이루니
죽음을 인정한 존재되어
불안은 바람에 밀려간다

밀려간 자리
그 자리는 견뎌야 할 시간되어
권태라는 고통을 일군다

전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을
존재의 시간은
권태의 울에 갇힌다

 



2008-05-28

 고픈 배를 채울 밥이 있다면

더 채우려 하지 마라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채우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 억지 하는 것
시간은 쓰레기가 되어 나부낀다

네 배를 채울 수 있어도
네 시간은 비어 있고
시간은 채운다고 더할 수 없으리

고픈 배를 채웠거든
네 시간을 즐겨라

채운 배(生存)에 의해 주어진 시간을
배 채우기 위해 다 쓰지 말고
너를 사랑하라



2008-05-27

구름에 달

구름에 달가듯 한다 하지만

달은 달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저갈길 갈뿐 아무런 까닭없다

다만 0.0018km사람에 가리운 건
거리1km의 구름에 거리384,000km의 달이라

아무 까닭없다



2008-05-20

 죽음은
내 능동 밖에 있지만
내 모든 걸 지배한다

태어나기 앞선 기억 존재하지 않듯
죽음 뒤에 기억 존재하지 않으리

노래한다
시간의 선율따라 울부짖는 삶의 소리도
끝자락에 머물고

이별도 사랑도
터질듯한 짜증에 두는 부질함일 뿐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마라
이러함도 그러겠지만
저러함도 마찬가지라
단절의 시간은 어느 때 어느 모습으로 알지 못하나
내 삶의 시간 위에 드리운 지프라기 일지라도
단절하고 싶잖다

호흡하는 능동으로 노래 부른다.
범위를 벗어난 능동 밖에 말은
부질없는 시간이라


2008-05-15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끝은

처음의 다른 모습이라
익숙한 호흡에
끊어진 처음으로 스치고
순간은 두지 않은 계획에서 비롯된다
여전히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다만
이 순간 필요로 하는 것에
나 또한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며
어긋나지 않는 모양에 그려지는 조건에서
나는 비롯하고 있다


2008-05-07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처음이 어찌 되었던

비롯함이 있으면 끄트머리가 있고
호흡하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머뭇댈 수 없는 호흡이라

천년에 시간이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거짓이 될 수 있듯
긴 시간의 의미 오늘에 거짓으로 서술 되나

거짓으로 전락하는 서술은
어쩌면 나를 자유롭게 하여
호흡에 매몰 시키고
끄트머리로 나를 해방하리라


2008-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