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3-09
2005-01-12
겨울
춥다
북해의 기운으로 살아온 무리들이 잊은
오랜 기억으로 들춰낸 바람이
출근길 아스팔트 위에서 눈보라를 잠시 맨들고
귀때기 씨리고 콧물이 알싸한 바람에
뼈골이 시원함이야
수천의 시간에 덕지덕지 붙은 잡스러운 것들을
턴다
봄이 드는 때에 이르러….
2004-11-20
저녁
다시금 때는 저물고
못다한 인연 끈이 노을에 붉어질 때
나는 너를 돌아본다
어둠이 오고
가녀린 인연마저 닫히는 때
나는 너를 불러본다
때에 이르러 너는
내 알지 못하는 흐름에 끝간 데 없을 뿐
나는 가는 것이 없다
2004-11-01
학교에서 1
강어귀 들판부터 한두 조각 비어내는 들판은
십일월 초하루의 햇살에 무르익은 가을을 동아리듯
허전함 빚고
간밤에 제 몸을 다 떨어
좁은 운동장을 노랗게 물들인 은행나무 아래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잦아들고
퇴근무렵
하루를 마감하는 녹녹함 보단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바람처럼
허허로움만 길게 뉘인다
2004-07-04
라면물 얹어놓고
라면물 얹어 놓고 무얼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라면물 얹어 놓고 무얼 할 것이가를
왜 생각하는 것일까
시간이라는 반성은 다시 풀어지고
아무것도 걸러지지 않는 손가락 사이로
또 하루를 걷어야 하는 이밤
아무것에도 뉘없어 못 잠드는 시간되고
라면물 얹어 놓고 무얼 해야한다는 생각은
라면물 끓는 때 마져 잃어버려
라면물 다시 받아 얹는다.
라면물 끓을 때까지
나는 숫자를 헤며 기다린다.
하나,두,세,네,아홉,스믈,서른아홉
마흔에
라면 물끓임으로 기다림은 얼마일까..
다시 라면물은 쫄고 말았다.
2004-03-12
다산(정약용) 俗儒論에서 선비 견해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님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중에서 가져옴
다산은 <속유론>(俗儒論)이라는 글에서 참된 선비와 속된 선비에 대한 분명한 구별을 시도했습니다. 제발 속된 선비는 물러가고 참된 선비들이 나라와 세상을 지배하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어떤 사람이 참된 선비이고 속된 선비인가도 제대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선비라는 이름으로 학문에 종사한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의 물정도 모르고 시의(時宜:당대 문제의 해결책)를 알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유자(儒者)들이 많던 시대에, 참된 선비를 희구하던 다산의 뜻은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참된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고 문식(文識)과 무략(武略)등에 처리하지 못할 바가 없고자 하는 선비이다.” (眞儒之學 本欲治國安民 壤夷狄裕財用 能文能武 無所不當)라고 하여 정치, 경제, 국방, 외교 등에 능통한 능력을 지닌 학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럴 능력은 없이 “옛사람의 글귀나 따다 글이나 짓고, 벌레나 물고기 등에 대한 주석이나 달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만 익히는 것이 학문이겠는가.”라고 속된 선비들을 질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산은 더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맹자(孟子)는 양(梁)나라와 제(齊)나라 임금들이 너무 전쟁만을 좋아하기에 인의(仁義)를 강조해주었는데 임금의 부족한 부분을 충고해준 것이지 인의를 제외한 다른 일을 알지 못해도 된다.”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자세히 설명하면서 인의만을 논해야 진짜 학문이고 형법, 병법, 재정, 세정(稅政)등을 논하면 모두 잡학(雜學)이라고 여기던 잘못된 학문 풍토에 엄정한 비판의 논리를 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200년이 지난 오늘의 참된 선비는 어떤 사람일까요. 현대의 모든 학문분야에서 각 분야에 가장 뛰어난 전문적 지식과 실용에 응할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인의(仁義)를 제대로 논할 수 있는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 아닐까요. 다산에게 여쭙고 싶지만 지하에 계신 다산은 말씀이 없으시니 답답할 뿐입니다.
박석무 드림 ( 다산연구소이사장 http://www.edasan.org )
참된 선비와 속된 선비
글쓴이 : 박석무 날짜 : 04-12-15 10:12
2004-01-14
2003-07-01
2002-03-12
“선비”의 어원(語原)
sunbi
<다른이 생각>
1. ‘선비’의 ‘선’은 몽고어의 ‘어질다’는 말인 ‘sait’의 변형인 ‘sain’관 연관되고,
‘비’는 몽고어와 만주어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박시’의 변형인
‘ㅂ,ㅣ”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김선기(언어학자)
2. ‘仙의 무리'(仙人 · 仙輩)라고 보아 소도(蘇塗)를 지키는 무사집단에서 유래됨
……….단재 신채호
3. ‘선ㅂ;'(선ㅂ,ㅣ)를 ‘선배(先輩)로 보아 신라의 화랑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고려초기부터 유래된 것이라함 …………..김동욱
<내생각>
‘선비’라는 말은 비롯된 것은 분명히 한자가 아니며, 지나(支那:중국)의 사(士) 개념도
아닌, 순수한 우리말로 지나의 유학(儒學)이 들어오기 전부터 존재한 말이지만
단지, 옛 문헌상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순 우리말 모두가 옛문헌에
다 있어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선비’라는 말의 어원을 짐작하면
‘선’과 ‘비’의 두가지 개념의 조합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선’이란 위에서 언급한
1) 몽고어의 ‘sait’는 지나의 善에 가까운 것이며 선비의 ‘선’과는 멀게 느껴지며,
2) 선(仙) 또한 선비의 ‘선’과 상당히 가까움이 느껴지지만 이것 또한 신선의 우리 고유의
개념을 한자로 차음한 것이기에 그대로 일치한다거나 여기서 나왔다고 보기 어렵다
‘선’의 개념을 알기 위해선 동아시아에 주로 쓰여지는 우리말의 ‘선’이라고 표음하는 걸
보면 鮮,善,宣,仙,禪 등으로 어느정도 닮은 뜻풀이로 보아진다.
그리고 아직 순 우리말에 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개념으로 ‘눈에 선하다’,’선을 보다’할 때
선의 개념으로 무언가 형체가 있는 존재에 대한 지식으로 특히 사람에 대한 용어로
그 사람의 실체의 앎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주로 쓰여짐을 볼 수 있다.
또한 ‘ㅅ’발음이 첫 소리값으로 들어가는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고귀한것이나
성스러운 것에 쓰여지는 경향이 있어 이로서 짐작하건데,
선의 개념은 ‘최상의, 보다 나은 실체, 좋은 것’ 이라는 뜻으로 보아지며
그리고
‘비’의 어원으로 ‘사물의 보는 눈이 밝다’라는 ‘밝다’에서 뜻에서 밝은이로 보아지며
‘선밝은이=>선배=>선비’ 로 불리어졌다고 본다
다시말하자면 ‘선비’란 “보다 나은 것에 대한 밝히 볼줄 아는 이”라고 하겠다.
2001-04-26
다시 돋은 푸르름에도
穀雨지난 이레인데
옷깃을 여미어도 가슴팍으로 스미는 싸늘함으로
밤늦도록 적시는 소리
헤어지고 다시 돋은 푸르름에도
가녀린 가슴앓이를 지울 수 없어
이 밤 내 숨결 끝자락마저 적시도록
봄비에 뉘이고 싶다
2001-03-12
핫바지와 엽전
현대과학을 유럽의 사유 방법으로 설명하면 우주의 처음 기원이 빅뱅이고 빅뱅의 대폭팔로 무한히 팽창하여 가는 것이 우주공간이라고 설명을 한다. 이 이론의 보완적인 설명으로 수축하는 공간의 블랙홀의 설명도 결들이고 있지만, 이러한 유럽의 우주관은 근본적으로 시작과 끝을 단위로 놓고 생각하는 방법에는 예나지금이나 큰 차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은 사물을 생성할 때도 순서 있게 처음부분과 끝부분으로 나뉘어 상당히 합리성 있게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 앞과 뒤 과 같을 수 없으며, 위와 아래가 같을 수 없으며, 왼쪽과 오른쪽이 같을 수 없다그러나 “한”의 모습을 말할 때 그러한 처음과 끝의 일목요연한 순서는 무의미하다.
처음과 끝이 없다.
임의의 처음과 끝은 있을지 몰라도 원래부터의 처음과 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예를 들어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고 말할 때, 움직이는 것은 정지한 것에 대한 상대적인 서술인 바, 태양을 정지한 상태로 파악한 상황에서 지구는 돈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태양은 정지한 상태의 별이 아니다. 태양은 은하계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으며 은하계는 다른 은하계와 상대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이 우주공간에는 절대 정지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절대정지야 말로 절대적인 좌표가 될 수 있으나 불행히도 우리의 좌표는 임의 좌표이지 절대좌표는 될 수 없다.
새로운 천문학에서는 지구의 태양을 상대로 하는 공전을 태양 인력(引力)이기보다는 시공간에서 지구가 움직임과 태양의 움직임이 각각인데 공전의 현상은 그 교차되는 현상의 일부라고 한다.
다시 말해 지구는 달아 날려하는데 태양이 억지로 붙들어 매여 두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말은 기존의 순서 있는 가치를 무너뜨리는 관념이다.
우리는 순서 있는 관념에 너무나 익숙하여, 순서 없고 앞뒤 구분되지 않는 사물을 뭔가 잘못된 것처럼 판단한다.
그래서 우리의 “한”의 모습을 / 스스로의 모습을 천시(뒤틀린 사대)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많음이란 순서 있는 논리로서는 설명이 안 되며
부분이면서 전체를 말하는 ‘한’은 분명히 기존 자연과학적 논리로서는 설명이 어렵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흐리멍텅하고 사리 분별없는 것처럼 치부되기 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민족의 사유방식에는 면면히 이어져와 ‘핫바지’의 앞뒤 구분 없는 모습과 세계에서 앞뒷면이 같은 유일한 동전 화폐인 엽전(상평통보) 등으로 현실 물건에서 표출된다고 본다.
실제로 지판(支阪:일본)에게 강점 당하였을때 그들이 비아양거리는 말로 조선인은 ‘핫바지’라고 표현하면 그 말이 아직도 앞뒤가리지 못하고 사리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하하여 이르는데 쓰이기도 한다.
정말 앞뒤가리지 못하고 사리분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말하는 이가 정말 수준 낮은 사고(思考)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합바지와 엽전은 그야말로 한의 모습을 현실에 담아낸 모습이며 그 모습에는 우주를 아우를는 관점이 들어 있다.
우주에 순서가 있다면 그것은 임의의 점이지 절대적인 위치란 있을 수 없으므로 처음과 끝의 순서란 없다. 천부경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을 그대로 사물에 적용한 사례가 바로 핫바지이며 엽전이며 이는 우주의 모양을 담고 있다.
무얼해도 세번은 해야
메소포타미아-그리스-유럽기독교-현대철기본적인 틀은 ‘선’과‘악’의 이분법이다. 그리고 지나 또한 ‘음’과‘양’의 이분법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선과악이 음과양이 있으므로 시작에서 끝으로 진행되는 시간성을 가지고(始原)있다.
이와 다르게 한국의 사고의 근본적인 틀은 삼분법이다.
세계 어느 겨레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럼 무엇이 삼분법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삼분적인 사고를 체계적으로 사상철학화를 완성한 단계는 아니지만, 사상을 엿볼수 있는 우리겨레의 언어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예로서, 단군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신화화 과정에서 한인.한웅.한검의 삼위일체적 신관(발해시대에 로마에 영향을 주어 기독교 삼위일체 신관 정립에 기여함), 천부인 3개, 칠을 세 번 더한 수를 21일이라 하지 않고 삼칠일이라 하는 것, 무엇을 해도 세 번은 해야 한다는 등, 고구려의 삼족오(三足烏) 문양, 삼태극, 네거리보다 삼거리를 선호하며, 가장 선호하는 숫자가 3이라는 것도 단순히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삼’에 대한 집착은 인근 지나(중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지나의 사상적 배경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