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익은 물기인가
오름의 턱받이에 텁텁한 물기는
쥐어짜면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다
넘어서는 오름에 불어오는 바람은
갓 씻어낸 가슴에 물기 훔치는 듯하다.
오름이라
바람이 씻어 만들었나 보다
뭉글뭉글 너울대며 스며드는 부드러움이
상기된 가슴 보다 더 한 것 같다
오름의 턱받이에 텁텁한 물기는
쥐어짜면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다
넘어서는 오름에 불어오는 바람은
갓 씻어낸 가슴에 물기 훔치는 듯하다.
오름이라
바람이 씻어 만들었나 보다
뭉글뭉글 너울대며 스며드는 부드러움이
상기된 가슴 보다 더 한 것 같다
나 아닌 다른 이를 너라 이르고
내게 너를 누구라도 그럴 이라 이르지만
나 역시 너에게 누구라할 이가 되는 걸
너를 기억하는 것은
너에게 내가 기억됨이 알길 없기에
내 심한 외로운 기억이라
기억의 시간만큼 기억을 더할 제
아무도 기억할 이 모를 것이기에
믿어지는 오늘에 공허함이라
그리고
난 누구에게라도 아무나로부터
기억에나 시간으로부터
풀어져 마냥이고 싶다
비는 봄밤에 익숙하게 내리고
익숙한 만큼 편함도 더하다
비는 어둠에 빈자리 밤새 스미고
스며든만큼 아쉬움도 더하다
소녀의 모습 안개속 가로등불 뒤로 사라지고
비는 차양천막 위에 때국물 되어 흘러
번뜩이는 가게 아줌마의 빠쁜 손놀림
이것이 인생이란다
네 아무리 용을 쓴들
오늘밤도 지나간 일로 지워질 것이라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너 다시 찾음은 지극히 나의 교만이란다
1.규명 작업
‘일본수산전문학교 실습선 한국 동해 연안의 수로 탐사 행위’가 일제강점기에 앞선 행위로서 침략의 사전 작업행위로 규명.
2.문제 인식
가. 현재 시설물의 안내에 단순 조난자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만 홍보되고 침략행위의 사적작업으로 부당한 수로 탐사내용이 없어 일반인들이 진실을 이해하는데 왜곡되게 함.
나. 단순 기념비일지라도 기념비의 규모가 지나치게 거대하여 조난자에 대한 애도의 위령비 보다는 정복지에 대한 표석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문제가 있음.
다. 기념비가 세워진 위치가 주위 자연경관(교석초) 빼어나고 호미곳과 영일만을 감도는 끄트머리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경관을 해칠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위치로 불쾌감을 느낄 수 있음.
라. 매년 10만엔의 관리비 명복으로 구만리기금으로 받고 있는 일본 자본이 식민에 대한 동정 내지 향수임을 인식
3. 대안 모색
가. 침략적 행위임을 일반인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추가설명비’를 제작건립
나. 기념비 수정 또는 교체, 폐기
(1안) 현 기념비에 침략적 행위를 덧새기는 방법
(2안) 거대한 기념비를 무릎높이 이하 크기로 교체
(3안) 기념비를 부수어 조각으로 전시(파쇄)
(4안) 없애 버림
다. 기념비 위치 변경
(1안)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현 위치에서 내륙으로 이동함.
(2안) 현 위치에서 무릎높이 이하로 교체하고 재건기념비(1971)와 추가 설명비를 제작하여 나란히 진열하는 방법
라. 현재 기념비관리기금으로 받는 자본을 마을 공동경비로 사용하고 있는바, 이 기금을 포항시에서 보전해 주도록 하고 일본 자본 차단해야 함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일시 : 2006.04.23(일)
장소 :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
조사에 참여한 사람 : 정ㅇㅇ지부장, 이ㅇㅇ위원장, 서ㅇㅇ, 이ㅇㅇ, 정ㅇㅇ
1. 조사 동기
최근 동해안 한국의 배타적경제구역(EEZ)안에 일본이 수로탐사을 실시할 것을 국제수로기구(IHO)에 통보함에 따라 한국정부는 이를 침략적인 주권침해로서 강력히 항의하였고, 마땅한 협상은 아니나 협상을 통해 일단은 사태를 유보하는 선에서 진행과정은 멈춘 상태이다.
우리는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일본이 이와 유사한 사례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이미 100년전 일제의 대한제국을 병탄과정에 있어서도 우리의 영토를 해양조사(수로,수심 조사)를 한 사실이 있으며, 이 조사과정에서 조사선 좌초사건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그 희생자가 당시 한국정부의 등대시설 미비로 발생되었다는 적반하장의 책임을 물어 제국주의 침략사에 제일먼저 한다는 항로표시시설 등대를 하였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실습선이 좌초되었던 대보면 바닷가에 세워져있으며,
우리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에서 10여년전 한차례 조사한 바가 있어, 이번 기회에 보다 더 확실한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의 성격과 내용을 파악하여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다 더 확실한 침략적 행위임을 확인하고자 기념비가 세워진 곳을 찾았다.
2. 조난기념비가 세워진 위치는 10여년 전 한차례 조사한 사진이 있어 쉽게 위치를 가늠할 수 있어 찾았으나, 이전에 밭 가운데 위치하였던 것을 해안도로가 개설되면서 도로 옆 바다와 바로 인접한 위치에 조경시설까지 곁들여 설치 되어 있었다.
기념비가 있는 곳 전경 |
1) 사각기둥비문
2) 작은비문(1971년 재건하면서 세운 비석)
구분 | 비문 내용 | ||
앞쪽 | 水産講習所 | 快鷹丸遭難紀念碑 | |
實 習 船 | |||
牧 朴 真 書 | |||
왼쪽 | ㅇㅇ 十五年九月九日建 發起者 當時 乘 組職員友生徒一同 | ||
오른쪽 | ㅇㅇ 四十年九月九日遭難 殉難者 | 技師 吉永貴 八朗 生徒 池野仲 藏 同 久米川有 一 同 消谷育 三 |
앞쪽 | 日本帝國統治三十六年暗黑時代 涇 祖國光復う喜 … .. ( 한자,일본어 토씨로 작성 내용은 뒤쪽 한글과 같음 ) |
뒷쪽 (한글 내용은 앞쪽과 같음) | 일본제국통치 삼육년의 암흑시대를 거쳐서 조국광복의 기쁨을맞이한 뒤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 되고 일본이 한국을 반도 유일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했고 또 배상에 응하였다는 것은 과거의 침략을 참회한 증표인 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친 자들 어찌 책망하리요 만방과 수교하고 인류평화에 공헌하고저 하는 우리 선조 전래의 홍익인간의 정신에 따라 구원을 초월한다는 것은 결코 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이곳에서 조난당한 일본인들은 침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 고로 육십만 한국교포가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그 옛날 망령들을 애도하는 한편 한일 양국민의 우의를 돈독하기 위하여 재일동포 한영춘씨가 사재를 내어 이 비를 재건한 것은 영구히 칭찬의 대상이 될 선행이며 미덕이 아니겠느냐 한씨의 간결한 뜻을 칭송하면서 이 글을 찬하노라 1971년 10월 일 ㅇㅇㅇ찬 김용구 서 |
다. 비문의 내용중 조난시일과 비석을 세운 시기를 알 수 있는 연호가 새겨진 부분이 파내었는지 시멘트로 덧칠하여져 있었고, 작은 비석에는 글귀를 찬(讚)한 사람의 이름이 파내어 지워져 있었다.
라. 해안도로를 개설하면서 포항시에서 현위치(구만리 491-2번지)비석을 이전설치하면서 비석 받침돌(좌대)에 안내 글귀와 안내 게시판을 설치하여 두었다.
ㅇ 비석 받침돌 내용(2001.도로개설로 이전 설치시 새김) |
實習船 「快鷹丸」遭難紀念碑 1907.7.7日本 水産講習所(現
東京水産大) 實習船 快鷹丸가 漁業實習을 위해 日本 品川中에서 迎日灣으로 出航하여 航海하던 중 |
ㅇ 안내 게시판 내용(도로개설 2001년 후 세움) |
일본 수산강습소 실습선 쾌응환호(快鷹丸號 )조난 기념비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될 무렵 당시 1907년 9월 9일 일본수산강습소 실습선인 쾌응환호(137톤급)가 수산시험(해류. 어족분포 연해수심 등 조사)을 위하여 동해안에 내항하였다가 구만2리 앞 해중에서 좌초되어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조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일본의 압력으로 바위와 파도 및 조류가 심한 교석초 앞에 해상안전을 유인하는 수중등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26년 9월 9일 당시 그 배의 승무원과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이 곳에 「수산강습소실습선쾌응환조난기념비」를 세워 해마다 참배를 하여 왔으나 해방 후 현지 주민들이 이 비를 훼손하여 방치해 오다가 1971년 10월 한영출(韓永出)의 주선으로 방치되었던 비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
마. 이번 조사에서 주로 확인된 바와 같이 작은비석 글귀와 비석받침돌 그리고 안내게시판 각각의 글귀가 약간의 다른 점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작은비석에서 ‘침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 고로’라고 새긴 것은 실습선의 조사행위가 오히려 침략행위와 관련이 있음을 반증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침략행위와 전혀 무관하다면 굳이 비문에 변명 같은 글귀를 새길 필요가 있었겠는가!
둘째, 원래비문(큰비석)에는 단지 실습선이라고 했을 뿐이며 두 번째 1971년 재건하면서 세운 작은 비석에는 조난사고라고만 언급되었고 ‘실습선과 항해목적’등은 전혀 기술되지 않았으며, 특히 받침에의 설명과 안내 게시판의 설명은 동일한 부분에서는 동일하게 설명함이 마땅한데 다음과 같이 다르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분 | 용어사용 | 항해 경로와 목적 |
큰비석 | 교사(敎師) | 언급 없음 |
작은비석 | 일본인 | 언급 없음 |
받침돌 | 기사(技師) | 어로실습을 위한 풍천중에서 영일만으로 항해 |
안내게시판 | 교관 | 수산시험(해류. 어족분포 연해수심 등 조사)을 위하여 동해안에 내항 |
셋째 받침돌에서는 다른 곳에는 언급이 없는 “태풍”을 언급함과 안내게시판에 ‘수중등대설치’등의 설명은 사건의 연혁에 해당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따로 인용되었으며 다른 자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비석의 연호를 지워둔 것은 일본연호에 반일감정을 자극할 수 있음에 재건당시 재건을 주도한 측에서 일부러 그렇게 해 두었는 것 같고, 이는 마을 주민의 말에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은 비석에 재건을 찬(讚)한 이름을 파내어진 것은 그 비문의 내용이 느끼는 바와 같이 졸렬함이 있어서 그런지 찬(讚)한 사람이 스스로 부정하고싶어서 그런 것인지 제 3자가 비난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비석글귀를 지우고 파내어진
상태로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만 보아도, 이 비석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리 일행은 비석이 세워진 자리를 떠나 이 당시 조난사건을 계기로 세웠다고 알려진(http://www.sunrisei.co.kr구사모) 호미곳 등대에 가서 관련자료를 찾아보고자 출발했다.
위 구사모 웹사이트에서 호미곳 등대설립과 관련하여 역사이야기로 아래와 같이 기술 되어 있었으며, 사망자 4명을 30명과 등대시설 건축연도 등이 잘못 기재된 내용도 있지만, 사건경과와 이후 현재까지에 대한 과정의 언급은 기록의 자료보다 구전의 자료를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상당히 신뢰할 만한 내용으로 보여진다.
일본 제국이 청.일 전쟁 승리 후 일본제국 수산실업 전문학교 실습선이 교사 및 생도 30여명을 태우고 해류 어군의 표류상황 한국연안 수심조사등을 목적 으로 동해안을 항해중에 영일만 장기갑 지금의 대보리 앞바다를 지나다가 암초에 부딪쳐 실습선이 조난을 당하여 일본학생 30여명 전원이 익사한 사고 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이 한국 정부의 연안 해운 시설의 미비로 발생한 사건이라하여 해운시설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발송함과 동시에 실습선의 조난사건의 책임을 한국정부에 뒤집어씌워 손해배상을 요구하는등 생트집을 함으로 한국정부는 부득이 한국 돈으로 일본인에게 등대시설을 청부시켜 1902년 3월 착공하여 1903년 12월에 준공하여 불을 켜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중략… 일본수산 실업전문 실습선 탑승원과 등대수의 순직비가 이 부근에 있었으나 해방후 철거되었다가 다시 한일외교가 트이고 한일국교가 정상화됨에 따라 철거 되었던 비를 이곳에 다시 세워 놓았다. (구룡포읍 웹사이트 자료) |
출발하기 앞서 구만리 마을에 옛 아는 사람(지인)이 있어 잠시 만나는 과정에서 오늘 방문의 경위를 이야기 나누던 중, 현재도 일본인 해마다 조난기념비에 제사를 지내려 오며, 기념비를 관리하는 관리하는 명목으로 해마다 10만엔 정도 보내준다고 하였다.
등대 박물관에 도착하여 박물관 내부를 관람하면서 등대설립에 관한 연혁 또는 배경을 알아보고 살펴보니
등대박물관에는 다음과 같이 전시되어있었다.
등대박물관 전시물 |
그리고 바로 이웃한 등대 안내게시판엔 다음과 같이 표기되어 있었다.
호미곳 등대 게시판 |
우리는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석의 안내문과 등대박물관의 전시물에서는 조난사건 시점을 1907년 9월 9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등대 안내 게시판에는 1901년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년도가 6년 정도 차이 나는 것이 100여년 전에 일이라 착오로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1901년과 1907년은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1905년 을사늑약이 있었으므로, 사고시점이 1901년일 경우 을사늑약 이전으로 온전한 주권국가인 대한제국의 해양조사를 한다는 것은 주권국가에 대한 분명한 침략이며, 그 조사행위가 이후 을사늑약과 대한제국 병탄을 위한 사전 작업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지만,
조사행위가 1907년일 경우, 이미 우리의 대외적인 모든 주권을 박탈하고 침략행위가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단순한 학술적 일 수도 있거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작업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연도이든 우리강토에 대한 해양조사활동을 벌인 것 자체가 부당한 행위로서 용납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위와 같이 비석문에서 지워진 연호를 추정하여 ‘명치’로 본다면 명치 40년은 1907년에 해당되어 몇몇 전시물에는 사고시점을 1907년으로 기재한 것으로 파악되나, 그럼 왜 등대 안내게시판에는 1901년으로 기재되었는가를 조사하고자 항로표지(등대)관리소장의 안내를 받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등대게시판과 박물관과 비석의 년도표시와 다른 점을 물으니 항로표지관리소장(ㅇㅇㅇ)의 이야기로는 항로표지에 기술되어있는 사력에 보면 조난사고 시점이 1901년이라고 알고 있고 그러한 자료를 기초로 등대게시판에 1901년이라고 명시되었다고 설명했다.
탐문할수록 조난사고 경위 시점은 더 많은 의혹을 가지게 하였다.
비석 있는 곳의 안내게시판의 1907년도 표시는 비석의 ㅇㅇ40년을 근거로 표시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등대게시판의 표시와 관리소장의 말에서 확신하는 1901년가 오히려 정황으로 봐서는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석있는 곳은 안내게시판과 좌대와 박물관 전시물의 1907년도는 2001년 비석을 이전 설치할 당시 파악한 자료로 비석의 글귀와 일본 측에 확인한 자료일 것이며
둘째, 등대게시판에 명시된 1901년도는 관리소장의 주장처럼 등대운영을 해오던 초창기부터 전하여 오는 이야기로 조난사고시점에 관한 인지가 더 오래 되었으며
셋째, 년도의 1901년이냐 1907년이냐의 경우에 따라 실습선의 조사행위가 침략행위 직접적인 과정이냐 침략으로 자행된 행위이냐로 구분되기 때문에 일본 수산실업전문학교에서 기념비를 세울 당시부터 이 사안을 염두에 두어 고의로 명치40년(1907년)으로 기술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고의가 있었기에 등대관리 역사에는 비석의 글귀와는 달리 광무5년(1901년)으로 전해오지 않았겠느냐 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조난사고 시점에 대한 명확한 확인을 하지 못한 채 점심식사를 마치고 등대시설물을 관람한 뒤 비석이 있는 마을의 주민을 만나러 다시 구만리를 찾았다.
마을에서 오래동앙 청년회장을 하였다는 분(배정현_현대수퍼)과 리장을 했던 분(윤두규)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로부터 사고시점에 대하여서는 이미 100년전의 일이라 목격자가 생존하여 있을리 없고 목격자로부터 전해 들은 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했지만 이 또한 비석을 처음 세운 것(1926)만 본 목격자 조차 1995년도에 91세로 별세했다는 이야기만 있을 뿐 사고당시에 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71년도에 비석을 재건하는 과정과 현재까지 일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1) 1971년 비석이 세월 질 당시 수산청에서 마을주민들에게 공문으로 일본인들에게 적극 협조하라는 지시를 받아 그 당시에서 마을 주민들 간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찬반 논란이 있었으나 당시 군사정권하에서 관청이 지시하는 일에 이이를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와
2) 비석을 재건하고 난 뒤 그 관리를 두고 일본 동경수산대 측은 마을 주민을 회유하기 위하여 주민대표와 계약을 맺고 마을에 간이상수도 시설을 가설하는 등 주민지원사업을 해주었으며, 그 당시 비석관리비 명목으로 매년 10만엔을 마을 기금으로 보내준다고 하였다.
3) 기금의 지원 방법은 지원주체는 동경수산대학 측이지만 중간에 사회단체인 ‘로타리클럽’을 거쳐서 보내준다는 이야기가 있어 뭔가 석연찮은 절차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3. 조사일정을 마치며
이로서 조사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과 함께 다음에 추진해야할 일을 의논하였다.
가. 계속 남은 의문점
– 사고 시점이 2가지로 전해오는 각각의 근원은 어디에 두고 있으며
– 정확한 조난사고 시점은 언제인가
나.
앞으로 해야할 일들
사고시점에 경우가 달리하여도 포괄적인 침략행위로서 규정되므로 실습선의 조사행위에 대한 사실조사가 필요하므로
1) 비석의 이전설치를 하면서 받침돌 글귀와 안내게시판을 포항시에서 제작한 바 포항시에서 조난사고와 관련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으로 포항시에 자료요구 또는 정보공개청구를 하여 보다 자세한 내역을 알아 봐야 할 것이며
2) 실습선 조난기념비를 재건하고 이후 마을에 관리비를
송금하는 주체인 일본 동경수산대학교이므로 이 대학에서는 당시 조난사고와 관련하여 기록이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파악되므로 당시 실습선의 항해일지, 조사한 자료 등의 자료를 요청하여 확인해봐야 하며, 행여 일본 측에서 자료제공에 성실히 임하지 않을 경우, 일본측에서 그토록 소중히 여겨는 기념비를 파괴하겠다는 압력을 가하면 효과가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3) 이상의 자료조사와 확인이 끝나면 처음부터 침략적인 실습선으로 규정할 근거가 충분하나, 보다 더 정확한 실습선의 조사행위를 파악하여 이
사건을 규정하여만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이와 관련 자료를 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조사할 필요가 있음.
4) 자료조사와 확인이 끝나면 이에 따른 사건의 성격 규명을 공포하고 현 비석이 있는 곳에 관광안내게시판이 아니라. ‘침략 역사 현장’으로 사실규명과 설명을 곁들인 비석을 세우도록 포항시에 요청하고, 포항시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사회운동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음. 끝.
도시의 한가운데
여간해선 맡을 수 없는 냄새가 아침나절 코끝에서 뭍어난다.
창밖 흙먼지에 뿌우옇게 흐려진 건물숲이다
테레비엔서 중금속이 다량 함유되었니 어쩌니 하지만
내 코끝에 느껴진 건
어린시절 이른 봄 강가엔 소꼴 뜯으러 갈제
들녘에서 강가에서 익히 느꼈던 흙내음이라
고비에서 출발하여 적어도 이천오백키로
태고의 전설같은
내 잊어 버린 시간을 안겨준다.
얼음깨고 씻은 얼굴에 참바람 몰아치던 시간은 갔다
장대비 쏟아지는 밤에 취한 몸 가누지 못한 때는 버려졌다
연두빛 파르라니 추위에 떨던 새싹처럼
내 가녀린 시간은
모판에서 찢겨져야 잘 살 것 같아
이양기에 찢겨진 포기 처럼 찢어진 세월은
가실걷이에 이르를 시간인데
불러도
돌아볼 수 없음이라
내게 남겨진 건
얼마간의 남은 시간 후
흔적으로만 기억될 그루터기엔
내 가녀린 시간의 기억은 없을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