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9-20
2005-08-18
독도 연표
백두산 정계비 설치
청 황실은 선조의 발상지로 영산으로 여기는 백두산을 청의 영역 아래 두고자
서기 1677년 청(淸)조 강휘제 16년 내대신 우무누[武默訥(무묵눌]로 하여금 백두산을 답사하도록 함.
서기 1684년 청은 변장,러추(勒楚)로 하여금 압록강 상류를 통한 백두산 답사를 하도록했으나
답사도중 조선인에게 함부로 총질하다가 도리어 총에 맞아 부상을 입어 답사가 실패로 돌아감.
목등[穆克登(목극등)]의 백두산 탐사
서기 1712년 2월 우라총관(오랍총관) 묵등(穆克登) 일행 백두산 탐사에 조선이 동반협력해 줄것을 요구하여, 조선 의정부우참찬 ‘박권’을 접반사로 하고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가 압록강 상류에 있는 후주(厚州)에서 이선부 일행과 만나고, 5월4일 혜산진에 도착하여 조선 접반사 박권 일행과 만나서 백두산으로 출발하여 5월 11일 백두산 천지에 도착하였다.
정계비 건립
묵등 일행은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오면서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인정되는 분수령에다가 주변을 더 살펴보고 경계비를 세우기기로 하여 1712년 5월 15일 정계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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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첩식(글쓴이)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군관 이의복 조대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
2005-08-15
2005-08-04
‘조·중 경계〓토문강’ 확인(조선일보)
고구려재단, 백두산 정계비터 찾아내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이 국경 확정을 위해 세운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를 한국 학자들이 확인했다. 현장 확인 결과, 정계비에서 두 나라의 경계라고 밝힌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松花江) 지류임이 분명해졌다.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金貞培)은 3일 지난달 19일부터 30일까지 북한 학자들과 북한 내 고구려 유적을 공동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며 “백두산 등반길에서 정계비가 있었던 곳을 확인했다”며 사진을 공개했다.
정계비 터가 있던 곳은 백두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주차장의 군 초소 뒤편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정계비를 세워놓았던 받침돌과 북한이 1980년 그 옆에 세운 글자 없는 흰 비석(높이 45㎝)이 있었다. 김정배 이사장은 “주차장 근처에 정계비 터가 있다는 증언과 주변 지형, 중국어판 북한 지도에 천지에서 동남쪽 4㎞ ‘백두산 사적비’로 표기된 지점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조사에 참여했던 고구려연구재단 배성준 연구위원은 “정계비 터에서 동쪽으로 바라봤을 때 송화강의 지류인 마른 물줄기가 보였고,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紅土水)와 석을수(石乙水)는 전방의 대각봉(大角峰) 너머에 있었다”고 말했다. 백두산 정계비는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土門)으로 경계를 삼아 그 분수령에서 돌에 기록한다”고 쓰여 있었으나 1931년 만주사변 때 없어졌다. 중국은 토문강이 두만강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백두산 정계비가 있던 자리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광경.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는 토문강(송화강 지류·점선)의 마른 물줄기만 보일 뿐 두만강 상류는 대각봉(가운데 산봉우리)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계비는 압록강과 토문가의 분수령에 세워진 것이다. 작은 사진은 북한이 정계비터에 새로 세워놓은 비석. |
2005-08-03
백두산 정계비터 정확한 위치 찾았다
[오마이뉴스 2005-08-03 15:35] [김태경 기자]
▲ 북한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터 표지석. 검은색 돌은 지난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사용했던 주춧돌로 보인다. ⓒ2005 고구려연구재단
▲ 백두산 정계비터에서 바라본 토문강의 흔적. 가운데 빨간 색 타원 안이 토문강이 흘렀던 곳으로 추정된다. ⓒ2005 고구려연구재단 |
광복 뒤 처음으로 백두산 정계비터의 위치가 남측 학자들에 의해 확인됐다. 그동안 남한 내에서는 정계비터의 정확한 위치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지난달 19일부터 30일까지 방북해 북한 학자들과 고구려 유적 공동 조사를 벌였던 고구려 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 측은 이번 방북 기간 중 백두산 동남쪽 4㎞ 지점(해발 2200m)에 있는 백두산 정계비터를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고 3일 밝혔다.
백두산 정계비는 지난 1712년 세워졌으나 지난 1931년을 전후해 일제가 철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광식 재단 상임이사는 “백두산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는 주차장 모퉁이 북한군 초소 뒤에 백두산 정계비터가 있었다”며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등정한 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북한군 초소 뒤에 있는 이 정계비터를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재단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 사용했던 주춧돌이 있고 그 위에 북한 당국이 지난 1980년 세운 흰색 비석이 있다. 일종의 표지석같은 이 비석에는 아무 설명도 없어 그냥 봐서는 백두산 정계비터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고구려 연구재단의 배성준 연구원은 “북한에서 출판한 중국어판 백두산 안내서에도 이 곳을 ‘백두산 사적비’라고만 했을 뿐 정계비터라고 표기하지 않아 직접 설명을 듣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1962년 중국과 국경 협정을 맺은 국경선을 확정한 북한 당국이 간도 문제 등 민감한 문제가 얽혀있는 백두산 정계비터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최 이사는 “그러나 초소에 있는 북한군들은 모두 이 비석이 백두산 정계비터를 확인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배 연구원에 따르면, 백두산 정계비터를 보면 원래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져있던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라는 말의 뜻을 알 수 있다.
즉 백두산 정계비터에서 볼 때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며, 동쪽으로는 토문강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 청나라는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고 주장했으나 두만강의 발원지는 백두산 정계비터 앞쪽에 보이는 대학봉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토문강은 송화강의 한 지류다.
안악 3호분 등 남쪽 학자들에게 처음 공개
이에 앞서 지난 3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는 여러가지 자료 등을 토대로 “장군봉으로 올라가는 주차장과 북한군 초소 부근에 정계비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재중동포들이 제작해 지난 1997년 9월 14일 KBS가 방영한 <일요스페셜> ‘최초공개 북한에서 본 백두산’에서도 정계비의 주춧돌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남쪽 학자들이 백두산 정계비터의 모습이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이번 남북 공동조사에서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원들은 덕흥리 고분, 수산리 고분, 안악 3호분 등에서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유리벽 안에 들어가 직접 벽화를 촬영했다.
고분 벽화 사진을 촬영한 김진순 연구원은 “이제까지 공개된 고구려 벽화고분 사진은 그리 자세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자세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이번 조사에서 그동안 알려진 ‘강서 소묘’의 도면이 잘못된 것을 확인했다. 강서 소묘의 도면은 일제 시대 때 잘못 제작된 도면이 이제까지 그대로 통용되어 왔으며 북한 학자들도 이 사실을 몰랐다. 안악 3호분·태성리 3호분·인민 대학습당 부근의 평양서 각석은 이번에 처음으로 남측 학자들에게 공개됐다.
김정배 이사장은 “이번 조사는 광복 뒤 처음으로 이뤄진 고구려 유적 남북 공동조사였고 새로운 성과도 있어 고대사 연구에 새 계기를 마련했다”며 “우리 재단은 이번 공동조사에서 남북 학자간 주고받은 논의 내용을 정리해 앞으로 남북 공동 학술토론회로 연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안악 3호분의 무덤 주인공을 놓고 중국의 망명자인 ‘동수’설과 ‘고국원왕’설(북한 쪽 주장)이 맞서고 있다. 북한 쪽은 특히 이 문제와 관련한 공동학술토론회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경 기자
2005-05-18
조선(朝鮮)』의 유래(어원)
1. 통설
‘ 아침의 신선함 ‘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알고 있음( 지나(중국)중심의 얕은 생각임 )
2. 문헌 및 각설
1) 최초 문헌 등장
《관자(管子): 춘추시대 BC8~7 제(齊)나라 ‘관중(管仲)’이 지음-주된내용은 BC403~221에 추가됨》경중편에 하나의 “지명”으로 ‘조선’이 언급됨.
2) “조선에는 명칭은 열수(冽水)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冽水),산수(汕水)라는 3개의 강이 있다. 이강들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AD3C 위나라 장안(張晏)
3) 동쪽의 해 뜨는 곳에 거처함으로 조선이라고 하였다-신동국여지승람 평양부 군명(郡名)조
4) 조선의 음은 조선(潮仙)이다. 물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동사강목:안정복》〈잡설〉‘조선명호’ 인용《국조보감》
5) 선은 밝은 것이다. 땅이 동방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므로 고로 조선이라 했다.-《동사강목:안정복》〈잡설〉‘조선명호’ 인용《조선고이》
6) 신채호.정인보 설
《만주원류고:1777》에 근거하여 만주어의 “주신(珠申,州愼)”과 비슷한 말로 풀이하여, 《만주원류고》에서 ‘주신’을 ‘소속(所屬)’으로 풀이하듯 ‘관경(管境)으로 풀이하고 ” 주신->숙신, 조선 ”
7) 리지린(북학학자) 설- 숙신족(현 만주 동북-사할린 지역 여진족의 명칭으로 통설됨)종족 명칭에서 유래.
8) 기타 설
아사달->아사+달(아침의 땅)-[한자의역]조선(朝鮮)
3. 내생각
1)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바꾸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는 할 때 화령(和寧:영흥의 옛 이름)과 ‘조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 사실이 있는 것은, 먼저 ‘화령’은 자신의 출신지명을 따온 것이고 ‘조선’은 자신이 세운 나라 강역의 옛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보통 옛 나라이름을 따올 경우, 시대적으로 뒤에 오는 나라이름은 ‘뒤(後)’ 또는 ‘새(新)’라는 접두사가 붙기 마련인데, 그러한 접두사가 없이 옛이름을 바로 가져다 쓴 것은 고려말까지만 하더라도 옛 조선(고조선)을 당시의 왕조국가 형태의 나라(국가)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반증이기도 하며, 당시국가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연맹체의 국가나, 지역을 지칭하거나, 종족을 지칭하는 형태의 ‘조선’이 있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 명칭으로 대변 되는 ‘지역(강역)’ 또는 ‘종족(민족)’이 당시(조선 건국)의 주류세력가 일치한다고 여겼음을 알 수 있다.
2) 《삼국유사》〈기이편〉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乃 往二千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霧葉山亦云白岳在白州或云在關城東本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여(산해경엔 무엽산이라 했고, 또 백악이라고 했으니 백주에 있다. 달리 관성 동쪽에 있다 하니 백악궁이라)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니 요임금과 같은 때라」
현존하는 삼국유사는 1512년에 간각된 경주판으로 조선중기 판본이기에 古朝鮮의 ‘古’를 붙이고 ‘왕검조선’이라고 표기한 건 1512년 당시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함이라 보여진다. 김부식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1281년)에 ‘조선’이라는 명칭에 ‘古’자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째거나, 김부식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에도 왕조 또는 당시의 국가형태로 볼 수 있는 ‘옛 조선’의 자료는 지나(중국)의 자료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정임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옛 조선의 주체가 당시의 고려가 계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조선’의 명칭이 유래를 ‘국가명’으로만 고집하다 보면 지난 몇백년동안의 논쟁과 같이 억측만 난무할 뿐이다.
– (조용한)아침의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말은 한낮 생각해볼 가치도 없는 이야기다. 이 말은 근세의 중화주의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 아사달 역시 억측에 불과하다
– 주신-숙신, 조선 상당히 일리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용어가 바로 조선으로 변천한 것이라는 것은 무리이다.
3) 확실한 건
가) ‘조선’이라는 용어가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BC 5C 전에 존재했다는 것
나) 지나(중국) 동북쪽 한반도 북쪽에 존재한 명칭이라는 것
다) 최소한 지역, 종족(민족)을 대표하는 명칭이라는 것
이상의 확실한 근거를 놓고 보면, 만주강역(지역)에 수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져가거나 변형되어온 여진,숙신,읍루,부여,고구려,구려,거란,연,산융 등등의 종족이름이면서도 지역이름과도 같은 성격을 가진 명칭들과 같이 ‘조선’ 또한 어원의 출발은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단군, 위만, 기자 등의 조선지역에 주류세력으로 누대에 걸쳐 거쳐간 세력 또한 ‘조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워져 그 특정세력과 특정거점이 이동과 변천을 거듭하지만 이를 계승하였다고 여겨지는 각 시대마다 당시의 조건하여 조선의 후계라고 믿었을 것이며 고려를 이은 태조 이성계 또한 이와 같은 의식이라 본다.
다시 언어의 근원을 정리하자며
‘조선’이라는 용어는 현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존재했던 종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나라이름으로 확장된 용어이며, 뜻이 되는 어원은 고대어를 돌이켜 보기는 어려우나, 일설에 의한 ‘주신(신으로부터 부여받은)->쥬시엔->조선’과 도 같이 어느 종족이든 자신의 종족의 명칭을 말할 때는 당시의 언어로서 최고의 성스러움이나 권한,존중을 나타내듯이(보기; 이스라엘(신의나라) 중국(중심의 나라), 일본(태양의 나라) 등) 신과 결부된 최상의 뜻을 가진 언어로 말하듯이 ‘조선’ 또한 그러한 듯을 가졌다고 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뜻에 관련한 어원으로
신지(神誌), 식신(息愼), 숙신(肅愼), 진한(辰汗),여진(女眞),주인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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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조)는 ‘돌’의 음차일까?
鮮(선)의 뜻
朝(조)는 ‘돌’의 음차일까?
또한 ‘새’를 빗대어 삼국사기에 ‘鷄林(계림)’이라 하였었다. 아직도 ‘돌’이 붙은 새이름이 몇개 보이는데 ‘까투리’와 ‘팥닭’ 즉 뜸부기이다. ‘수리’란 맹금류를 칭하는 이름이었던 것처럼 ‘도리’를 접미어로 붙인 새들은 머리에 볏이 있거나 깃이 화려하다고 볼수있을까? 닭은 볏이 뚜렷하고 까투리는 암꿩으로 그 깃이 화려하여 박제를 많이 하였던 새이고 팥닭은 화려하거나 크지는 않지만 머리에 볏같은 깃이 조그맣게 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의 머리에 난 ‘볏’을 빗대에 ‘벼슬’한다고 하였던 것이며 우리나라의 상징은 예로부터 봉황이었다.
따라서 원래국호 ‘센「白」‘을 鮮의 음차하고 그 앞에 국가의 상징이었던 ‘볏달린 새’를 뜻하던 ‘돌’을 그 앞에 붙여 ‘돌센’이라고 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金(금)의 원래 국호는 朱申(주신)이며 또한 朱里眞(주리진)이라고도 한다. 里로 표기되는 발음은 중국인들이 자기네들 글자로 표기할때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朝鮮이란 표기도 그 중간에 里와 같은 ㄹ발음이 빠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다면 朝鮮도 ‘됴센’도 ‘됼센’ 또는 됴리센’으로 읽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며 이는 곧 鳥白의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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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ww.sejong.or.kr의 ‘닭’에 대한 풀이 참조
2005-05-10
2005-05-07
오월의 신부
산을 넘어서는 바람은 내내 운다
떠날 줄 알은 만남이지만
떠나는 기억속에 차마 부르지 못한 이름 있기에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면 아니 흐를 눈물일진대
후회하는 것이라면 아니 흘릴 눈물일진대
오월의 보리밭 위 하늘은 서럽도록 푸르구나
강을 거스르는 바람은 울지 않는다
사공이 띄운 배에 실린 몸이기에
불러도 돌아설 수 없지만 건너서도 돌아가지 않으리
약속할 수 없는 시간의 미련은 강물에 던지우고
맹세한 사람이여! 그 이름에 면사포 씌우고
오월의 신부는 입술을 깨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