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게
존재할 수 있는 범위
어디로부터 존재하게
존재하는 것은 없다
존재하게된 것은
누구도 존재를 계획할 수 없다
시간을 헤아린다
기다림도 없는데
소리쳤던 시간도
산너머 기차소리와 함께 멀어지고
바람이 대숲을 흔들어
차라리 아무것 흐름 없는 멈춘 공간도
시간은 헤아림으로 남는다
기차소리 다시금 들리고
여름같은 오월의 햇살은 내일에도 있을꺼라
헤아리지 않아도
천년을 앞서도 뒤서도 시간이였다
다만
내가 저 감나무 여린 잎을
천번을 볼 수 없다는 거
그것이
나로 하여금 헤아리는 자 되게 한다
기다리는 건 없는데두
마른 지프라기 널브러진 골목길
나락 끌티기 보리싹 사이로 흙바람 날리는 들녘
왠종일 돌아쳐 시겟또 송곳이 무디어지고
햇살은 어느 듯 저녁나절
뉘집인들 밥짓는 연기 뒷산 허리에 드리울때
밥먹으라고 정지에서 날 부르는 엄마 목소리
시멘트 길엔 사람 보기 어렵고
허연 비닐하우스 바다 멀리 산은 깎였다.
차타고 나갈일 아니면 마당에 마른잔디 홀로 앉아
해거름 저녁은 오는데
더 이상 밥짓는 연기도
밥먹으라고 두번세번 부르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것인가
님 그림자 천년 전부터 낮 익더라
푸른 빛 금오산정 귓볼을 스치니
뒷바라지 쪽문 옛 느낌 함께이라
구름에 하얀 반쪽 들락이는 달빛
가리어 질지언정 사라지지 않으며
마주하는 소리에 따스한 내음
물결 바람에 씻긴 줄로 알았는데
어느 곳에 머물려냐
길은 길에 이어 가고
곱게 물든 날리는 자리
돌아갈 때를 생각하고
머무는 곳은 알지 못하니
무엇으로 이제를 붙잡으리
손놓아도 몇달을 남었던 추억은
입을 떼어도 금새 흔적없어
세월이 바랜 것인가
욕심이 지나친 것인가
산 아래 낮은 지붕 위 드리우는 밥짓는 연기
나의 설레임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
길위에 벗어날 수 없기에
벗어나지 않도록 구르는 바퀴
끝없이 구르다가 한 번
한 번은 설레일만도 한데
손끝에 여운조차 없어
더는 더는 담을 수 없는 거가
체육관 붉은벽도 더 무거워 보인다.
울타리 넘어 마을은 차가운 안개에 가리웠다.
중간 놀이시간을
질펀한 운동장을 아랑곳 하지 않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시끄러움이 없다면
세상은 이대로 침몰할 것 같은 가을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은 ‘언문(諺文)’을 “상말을 적는 문자라는 뜻으로, ‘한글’을 속되게 이르던 말.”이라고 풀이하였다. ‘상말’이란 ‘점잖지 못하고 상스러운 말’로서 흔히 ‘쌍말’이라고도 한다. 이 사전의 뜻풀이는 잘못이다. 언문이 상말 글자라니? ‘언문’은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흔하게 쓰던 말이므로 그 사용 실태를 분석하면 너무도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풀이한다는 것은 어떤 의도가 숨어 있지나 않은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기록에 처음 ‘언문’이란 말이 나온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이 글에서 ‘언문’을 ‘상말을 적는 문자’로 바꾸어 보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상말을 적는 문자 28자를 지었는데 …’
(나) 다음 기록은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 2월 16일 기록이다.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以諺文譯韻會], 동궁과 진양대군 이유, 안평대군 이용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성품이 예단하므로 상을 거듭 내려 주고 이바지를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니, 이 글에서 ‘언문’ 대신 ‘상말을 적는 문자’을 대입하여 보자. ‘…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에 나아가 상말을 적는 문자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고 …’
(다) 그리고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에 기록된 최만리의 상소에서 ‘언문’이 쓰인 뜻을 짚어보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①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②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
③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1.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서하·여진·일본과 서번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④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라고 하였는데,
이때 ‘언문’은 ①②③④를 정리해 보아도, ‘상말을 적는 문자’가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라) ≪훈민정음≫ 해례본(1446)은 세종이 직접 쓴 서문과 정인지 등이 쓴 해례를 묶은 책으로서 가장 정음을 높이고 자세히 설명한 책인데, 이 책에서 이미 ‘언어(諺語)’라는 말과 ‘언(諺)’이라는 말이 나온다. 합자해를 보면, ‘如諺語爲地 如諺語혀爲舌(우리말 는 한자 地를 표시한 것과 같고 우리말 혀는 舌을 표시한 것과 같다.)’, ‘文與諺雜用則有因字音而補以中終聲者(한자와 우리글을 섞어 쓸 때는 글자 소리에 따라 가운뎃소리나 끝소리를 보충할 때가 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친히 명을 내려 임금께 바치는 서책에 그 임금이 지은 글자를 ‘상말을 적는 문자’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백보 양보하여 조선시대 사람들이 중국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우리 자신을 업신여기는 풍토가 있었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상말을 적는 문자’라고 낮추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말하는 사람은 모두 상말하는 상놈인가 말이다.
(마) 세종은 28년(1446) 11월 8일에 언문청을 설치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태조실록≫을 내전에 들여오기를 명하고, 드디어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일의 자취를 상고해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시(詩)를 첨입(添入)하게 하니,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실록은 사관이 아니면 볼 수가 없는 것이며, 또 언문청은 얕아서 드러나게 되고 외인의 출입이 잦으니, 신 등은 매우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즉시 명령하여 내전에 들여오게 함을 돌리고, 춘추관 기주관 어효첨과 기사관 양성지에게 초록(抄錄)하여 바치게 하였다.[命太祖實錄入于內, 遂置諺文廳, 考事迹, 添入龍飛詩. 春秋館啓 實錄, 非史官, 不得見. 且諺文廳淺露, 外人出入無常, 臣等深以謂不可. 上卽命還入內, 令春秋館記注官魚孝瞻, 記事官梁誠之抄錄以進.]”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정음청’이 아니라 ‘언문청’이라는 이름의 관청을 만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정음과 언문을 동급의 말로 썼음을 드러내는 일이고, 중국의 사전 풀이와 같이, ‘언(諺)’을 ‘문자로 기록된 말이 아닌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늘 주고받는 말’이라는 1차적인 뜻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기록되지 않은 말, 기록 이전의 말, 사람의 입으로 주고받는 말’을 일러 ‘언(諺)’이라 하고, 이것을 적는 새로운 글자이기 때문에 ‘언문(諺文)’이라 한 것이다. 곧 ‘우리글 훈민정음’을 대신해서 일컫는 말로 쓴 것이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언문이란 말을, ‘상말을 적는 문자, 훈민정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서 사용하였다면, 적어도 위 기록처럼 임금 직속 국가 기관의 이름으로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뜻으로 일부러 사용하는 자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망발이 아니겠는가?
(바) <중종실록> 중종 6년(1511) 9월 5일 기록에는 ≪설공찬전≫을 금서로 하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헌부가 아뢰기를, ‘채수(蔡壽)가 ≪설공찬전≫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이 윤회한다는 이야기로, 매우 요망한 것인데 궁궐 안팎이 모두 현혹되어 믿고서, 한문으로 옮기거나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헌부에서 마땅히 거두어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 그러나 법을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憲府啓 ‘蔡壽作薛公瓚傳, 其事皆輪回, 禍福之說, 甚爲妖妄. 中外惑信, 或飜以文字, 或譯以諺語, 傳播惑衆. 府當行移收取, 然恐或有不收入者, 如有後見者治罪.’ 答曰 ‘薛公瓚傳, 事涉妖誕, 禁戢可也. 然不必立法. 餘不允.’]”라고 하였다. 여기서 문자는 한문, 언어는 우리말을 가리키며, ‘역이언어(譯以諺語)’는 ‘우리말로 번역함’을 말하므로 곧 ‘언해’를 뜻한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설공찬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임을 밝히게 된 것이다.
(사) 이밖에도 ≪훈민정음≫ 언해를 비롯하여 수많은 언해본이 전해지는데, ‘언해(諺解)’라는 말이 처음 쓰여진 것은 ≪소학언해≫(1587)와 ≪논어언해≫(1588~1590) 등 사서 언해(四書諺解)라고 한다. 여기서도 ‘언(諺)’은 ‘우리 말(글)’로 풀어야 옳다. 이와 비슷한 말로, 한문의 원전에 정음으로 달아놓은 구결을 ‘언토(諺吐)’ 또는 ‘언두(諺讀)’라 부르는 일과, 언해를 ‘언역(諺譯)’ 또는 ‘언석(諺釋)’이라고 쓴 것을 볼 때, ‘언(諺)’은 항상 ‘우리 말(글)’이라는 뜻으로 썼던 말임을 알 수 있으니, 조선시대의 ‘우리’는 곧 ‘조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초기 기록에서 보기글을 찾아본 결과, ‘언문’이란 “훈민정음을 ‘우리나라 백성들이 주고받는 말을 적은 문자, 우리 글자’라는 뜻으로 일컬은 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최만리와 같은 유학자들은, 중국과 대조하여 ‘조선 글자 또는 중국이 아닌 변방의 글자’로 여기고 이 말을 썼음도 알 수 있다. 언문과 함께 ‘언어(諺語)’라는 말도 해례본과 실록에 나타나는데, 이 말은 중국에서도 썼던 낱말이다. 큰 뜻은 ‘백성의 말소리’이며,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는 ‘(언문과 짝을 이루어) 우리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언문-우리글, 언어-우리말’ 정도로 풀이하면 잘 들어맞는다. 다음 달에는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져온곳 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http://cafe.naver.com/azazaq 2012.2.22.)
[ 옮긴 이 생각 ]
언문(諺文)을 상말이라고 하는 건 반드시 천시하는 것은 아니라 본다.
상놈(常놈)이라고 하는 말 또한 ‘보통의 사람’, ‘일반인, ‘백성’을 뜻하나, 관료가 우대받고 서열화 되는 사회에서 자연히 아무것도 없는 최하위 계층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 상대적으로 천하게 여기는 대상에 대하여 ‘상놈’이라고 칭하듯이
“언문”
한자는 상대적으로 어렵고 많은 학습과정을 통하여 배워야 하고, 지식을 독점하는 특정 계층에서만 사용하기에 스스로 고급스럽다 생각했을 것이고,
언문은 ‘보통의 글자’, 보통사람들이 쓰는 글자’ , ‘일반인들이 쓰는 글자로 인식하였기에
문화 사대에 빠진 계층에서는 천시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 관념에서 ‘언문’이라는 말을 요즈음 말로 풀이한다면
‘보통의 글자’, ‘서민의 글자’, 등으로 풀이할 수 있으나
그러한 계급의식에서 바라보는 관념 보다는
‘바탕이 되는 글’, ‘모든사람의 글’ 로 풀이하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진다.